작년에 여동생의 딸이 결혼식을 해외의 작은 섬나라에서 가질까? 했을 적에 미국 넓은데? 하며 신랑신부의 부모가 사는 지역이나 교통이 편리한 곳을 선택하길 바랬다. 그러나 뉴욕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은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낯선 장소를 정했다. 그들이 뉴 잉글랜드의 한 휴양지로 결정한 지 1년 후인 지난주 로드 아일랜드주의 뉴포트를 찾아갔다.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가족들은 장례식과 결혼식이 확실한 재회의 기회다. 이번은 결혼식으로 모인 기쁜 경우였고 또 어쩌다 보니 우리 부부가 연장자였다. 미시시피에서 온 동생들 부부도 60대 노인들이고 캘리포니아에서 온 조카는 어느 사이 50이 되어간다며 10년 전 내 딸의 결혼식에서 본 그의 두 아이들이 이제는 훌쩍 커서 중 고교생이라 했다. 자신도 40대에 진입한다는 미시건에서 온 조카는 내 기억에 있는 그의 철부지 모습을 떠올렸고 어린 사내아이 둘을 데리고 조지아서 온 조카는 앳된 모습이 억척스런 아줌마로 변했다. 세월은 모두를 변화시켰다. 어른들만 초대한 결혼식에 워싱턴DC에서 온 내 손주를 포함한 어린아이 3명이 가족 숫자를 불렸다. 호텔 라운지에 둘러앉은 남자들이 술잔을 들고 담소하는 옆에서 여자들은 카드게임 하면서 화기애애했다.
뉴포트는 한마디로 상큼하게 아름다운 곳이다. 1639년 초기 이민자들이 정착해서 발전시킨 대서양변의 소도시는19세기 미국 경제의 급성장기에 부호들이 유럽의 성들과 버금가는 규모와 장식을 가진 여름 별장을 웅장하게 건축해서 품위를 보탰다. 비가 온 날이나 맑은 날이나 천연 자연의 멋만 아니라 잘 보전된 과거의 영광을 재미있게 둘러봤다. 특히 해안절벽을 끼고 있는 산책로 Cliff Walk 걸으면서 저택들과 바다의 절경에 눈이 부셨다. 더불어 뉴포트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1974년 로버트 레드포드와 미아 패로 주연 영화의 촬영지여서 대저택들에 시선이 더 갔다.
리허설 디너에서 신랑측 가족들과 인사했다. 아일랜드 이민자인 신랑의 어머니는 아일랜드를 좋아하는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국어로 ‘어머니’ 글이 있는 그녀의 목걸이를 지적하니 그녀는 아들이 한국에 여행 갔다가 가져온 선물이라고 자랑했다. 우리는 한동안 한국과 아일랜드 이야기로 수다판을 벌렸고 그녀는 장한 아들을 키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서울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에 생후 6개월된 아이를 입양해서 건실한 성인으로 키운 아일랜드계 여인은 올 초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서 슬프지만 아들이 한국여자와 결혼해서 기쁘다고 해서 나는 한국고아를 입양해서 키워준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신부 어머니처럼 자신도 한복을 입고 식장에 들어선 그녀는 한국산 목걸이 보다 더 야무진 한국계 며느리를 맞았다. 이번에 처음 만난 멋진 청년이 밝게 웃으면서 조카의 손을 잡고 확 터인 바다와 뉴포트 대교를 배경으로 서자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모두를 감쌌다. 신랑의 어머니가 많은 지혜가 담겼고 행복과 신의 축복을 비는 Irish Wedding Blessings 을 읽자 눈물을 흘리던 신부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부드럽게 바라보던 신랑이 든든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이 앞으로 잘 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리셉션에서 많은 축하객들 사이에서 행복한 조카사위를 보면서 오래전 스웨덴에서 있었던 결혼 리셉션이 생각났다. 큰언니의 장남이 스웨덴 여자와 결혼식을 신부의 고향에서 가져서 우리도 스웨덴에 갔었다. 스톡홀름에서 한 2시간 거리의 작은 마을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타운홀에서 리셉션을 가졌다. 축하하러 온 마을 사람들 중에 한 동양남자가 있었다. 한국 입양아였다. 그는 힐끔힐끔 우리를 쳐다봤다. 동양인이 전혀 없던 그 지역에 그와 닮은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왔으니 놀란 것 같았다. 오후 내내 계속된 피로연 파티에서 언니네와 우리는 한국말 사용하는 것을 조심했다. 그동안 어디서나 한국 입양아를 보면 미안했는데 이제 한 사람이 우리 가족이 되었으니 그 미안함이 조금 가벼워졌다.
한국은 거의 20만명의 아이들을 해외로 수출했다. 보수적인 사회환경 탓이었지만 아이들의 삶은 순전히 아이들의 몫으로 던져졌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된 조카사위는 이제 아내를 통해서 자신의 모국을 찾고 정체성의 안정을 찾을 것이다. 훗날 그가 자신을 해외로 떠나 보낸 생부모나 모국의 과거 상황을 이해하기를 바랬다. 조카의 데스티네이션 웨딩 덕분에 멋진 휴양지 뉴포트 해변에서 파도를 타던 사람들의 여유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