뚫어져라 거울을 들여다보며 귀밑머리에 자꾸만 삐져나오는 흰 머리카락을 뽑아낸다. 흰머리 염색을 한지 두 달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작년 까지만 해도 3-4 개월 정도였는데. 계절이 바뀌어 갈 때쯤 머리도 다듬으며 기분 전환하듯 미용실에 들러 나이 들어 시들어 가는 내 모양새를 다듬고는 “아직은 괜찮네”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였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흰머리가 드러나려 할 때쯤 이면 얼른 덮어 버렸고 아직 난 괜찮은 척했던 것이다.
반백 년을 살아내고 있는 내가 머리카락 희어가는 것이 뭐 그리 놀랄 일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닐 진데 나는 필사적으로 가리고 덮는 것으로 희어진 머리카락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듣지 않았다. 오늘아침 여느 때처럼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으며 부쩍 많아진 흰 머리카락을 보고는 이를 어쩌나… 싶은 마음에 눈에 거슬리는 놈을 하나 잡아 뽑았다. 그거 하나 뽑는다고 안 보이는 게 아닌 데도 귀밑머리 하얀 머리카락 손에 잘 잡히지도 않아 족집게로 집어 잡아당겼더니 눈물이 핑 돌정도로 따갑고 아팠다. “젠장 이 짓을 왜 하고 있는 건지.”
흰 머리카락들이 나를 보며 말을 하는 것 같다. “애쓴다. 그냥 받아들이고 함께 살지. 나이 들어 가면서 흰머리는 아름다운 거야. 그걸 왜 감추고 싶어 하는지 자꾸 나를 창피하게 여기며 감추는 거 같아 서운하다.” 마음으로 전해 듣고서도 아직은 아니야 하면서 염색 약을 사러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평소에 멋스러운 모자를 자주 바꿔 쓰며 한껏 멋을 내는 환갑을 갓 넘긴 언니가 있는데 몇일 전 모자를 벗어 버리고 시원하고 밝은 얼굴로 흰머리 커밍아웃을 하겠다며 짧게 자른 머리에 제법 소복이 내려앉은 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는 무슨 자유의 몸이라도 되었다는 듯이 큰 소리로 말한다. “나 이제 염색 안 할 거야. 가리려고 모자도 안 쓰고 자유롭게 다닐 거야. 그렇게 알고 놀라지들 말고 그냥 봐줘요.” 이게 놀랄 일도 그렇게 비장하게 커밍아웃이라 이름 붙여가며 해야 할 일이었단 말인가.
흰머리와 검은 머리가 적당히 섞여 있는 언니의 얼굴이 모자를 썼을 때보다 시원하고 아름답다 느껴졌다. 진심으로 그 나이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멋스럼이 오히려 젊어 보이려고 진하게 물들여 흰 머리카락 하나 안 보이던 때보다 예뻤다. 새삼스럽게도 흰 머리카락이 개성으로 보였고 살아온 인생의 흔적처럼 고귀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도 그냥 염색을 멈추고 자연스레 삐쳐 나오는 흰 머리카락을 내 보일까? 순간적이나마 용기를 내보려 했지만, 그것도 잠시 “아직은 그래도…” 였다. 지금 나의 나이는 오십오세. 흰머리를 드러내기에도 감추기만 하기에도 어정쩡한 나이인 것 같아 아직은 수줍다는 듯이 몇 년 더 살살 감추어볼 심산으로 염색 약을 사가지고 왔다.
나와 함께 반백 년을 살아오면서 지지고 볶았다 갑자기 확 잡아당겨 쫙 펴 놨다, 어느 날은 징징 울면서 짧게 잘라 내버리기 까지도 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 했을까. “이제 나 좀 가만히 놔둬. 힘들어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고 있는 거 안 보이니?” 하는 것도 같다. 고맙고 미안하고 그렇다고 아직은 좀 이른 거 같은데 흰 머리카락 자꾸 내보내는 심보가 야속하다 말하고 싶지만 그것도 내 욕심이겠구나 싶다.
내 나이 언제쯤 이면 이 번거롭고 귀찮은 염색을 멈추고 활짝 웃으며 흰 머리와 아름다운 동행을 하게 될까? 그 자유로운 날을 기대하지만 아직은 조금 더 애쓰고 덮어주는 수고를 하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