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16)
골프장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나타났다. 따가운 햇볕 아래서 코치의 지시에 따라 공을 때리는 모습이 귀엽기도, 부럽기도 하다. 드넓게 펼쳐진 잔디 위를 걸으며 골프레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미국 아이들에게도 흔하지 않을 듯한데, 한국에 사는 아이들에게는 아마도 꿈같은 이야기겠지… 미국의 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여름방학은 칠월 중순을 넘어야 시작된다. 내 기억 속 여름방학은 언제나 매미소리로 시작했다. 검푸른 녹음 아래서 매미채를 들고 매미를 쫓아다니거나 강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하지만 나의 즐거운 방학 생활은 도시에서 자란 내 아이들에게는 이어지지 못했다. 아이들은 매미대신 다음 학기를 위한 예습과 복습 학원을 쫓아다녀야 했다. 더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방학은 점점 짧아져 일주일 정도만 집에서 보냈다. 되돌아보면 아쉬움과 미안함이 가득하다.
〈How I learn Geography〉 이 책의 첫 장은 ‘아버지를 기억하며’ 로 시작한다. 작가 유리슐레비츠는 2차 세계 대전 때문에 유럽을 8년 동안이나 떠돌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고 한다. 이 책은 작가의 가족이 전쟁터가 된 바르샤바를 탈출하여 하루아침에 피난민이 되어 겪어야 했던 전쟁의 피폐함을 그려낸 자전적 이야기다. 이국땅에서 손바닥만 한 방에서 낯선 부부와 함께 지내게 된 가족에게 무엇보다 부족한 것은 먹을 것이다.
어느 날 빵을 사러 시장에 간 아빠는 어둑해져서야 옆구리에 둘둘 만 기다란 종이를 끼고 돌아온다. 배고픔에 빵을 찾는 아들에게 아빠는 자랑스럽게 세계지도를 펼쳐 보인다. 아빠는 가진 돈으로 손톱만 한 빵밖에 살 수 없어서, 먹어도 배고프긴 마찬가지일 거라, 빵 대신 지도를 사왔다고 말한다. 아빠의 말에 아들은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끼며 아빠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누워, 같이 사는 아저씨가 빵 쪼가리를 씹으며 내는 쩝쩝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빠를 원망한다.
하지만 한 쪽 벽을 다 덮을 정도로 커다란 지도는 칙칙하던 방을 환하게 바꾼다. 그리고 아이는 금새 지도에 홀딱 반해서 종이가 생기면 며칠이고 지도를 그리고, 지도에 나오는 낯선 도시이름에 음을 맞춰 마법의 주문처럼 되뇌며 논다. 그러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도, 아주 멀리까지 날아가서 신기하고 아름다운 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 배고픈 것도, 힘든 것도 모두 잊고. “나는 아빠를 용서했어요. 결국, 아빠가 옳았으니까요.”라고 말하며, 이야기가 마무리 된다.
온종일 주린 배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부인과 아이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탓하는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힘없이 서 있는 아빠의 모습이 짠하다. 아빠의 이런 모습을 아들은 모른다. 그래서 빵 대신 지도를 사온 아빠를 원망한다. 작가 유리슐레비츠도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야 그때의 아빠를 이해하게 되지 않았을까. 전쟁이 가족에게 남긴 상처를 아빠의 자리에서 되돌아보며 담담하게 그림을 그려낸 것 같다.
아무 잘못 없이 전쟁으로 인해 죄인처럼 고개 숙인 가장의 모습을.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아이들에게는 꿈이 있어야하다. 꿈은 이룰 수 있다는 희망으로 자란다.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줄 진정한 양식이 무엇인지, 당장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빵보다 내일을 위한 희망을 채워 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겠다. 요즘 아이들에게 유리슐레비츠가 겪은 세계대전은 너무 먼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전쟁 중인 나라가 있고, 꿈을 찾아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사람도 있고, 꿈꿀 여유조차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쫓겨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꿈의 지도는 언제나 모두에게 필요하다.
가끔 골프장에 있는 호수에서 낚시하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골프공에 맞을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혼자 힘으로 물고기를 잡아내는 모습이 대견해 보인다. 그 모습에서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라.’는 탈무드 명언이 떠올랐다. 꿈의 지도를 한 지점에 맞추면 직업이 된다. 아이에게 꿈을 준다면서 직업을 말한다면, 아이는 물고기 잡는 법을 영원히 배우지 못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