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햇살이 고운 아침, 시애틀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시던 분들이 은퇴지를 알아보고 있는데 그 후보지 중 하나가 앨라배마라는 것이다. 은퇴자금도 넉넉하고 연금도 웬만하니 좋은 지역에 집과 생활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우리는 정겹게 지냈던 시애틀에서의 추억으로 한바탕 수다를 떨다가 우중충한 그곳 생활에서 햇빛 따스한 남쪽을 부러워했던 이야기를 끝으로 전화를 마무리했다. 한시간도 넘게 수다를 떨었음에도 여운은 그대로 남아 마음은 10년전 그곳의 생활속에 맴돌고 있었다.
시애틀은 이민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기에 첫정이 듬뿍 묻어 있는 그리움의 도시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살 때는 왜 그리 추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여름 한철, 2-3개월을 빼고는 꾸물거리는 회색빛 하늘에 으슬거리는 공기가 왜 그리 시리던지 …기다리던 여름이 오면 사람들은 미친듯이 웃옷을 벗어던지고 잔디밭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진풍경이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지곤 했었다. 얼음이 얼만큼 쨍하게 춥지도 않고 에어콘을 틀만큼 불볕더위도 아니었기에 뭐묻은 바지를 그대로 깔고 앉은 것같은 찝찝함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남편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따뜻한 남쪽나라로 갈거야를 심심찮게 읖조리곤 했었다. 정말 말대로 된다더니 우리는 이런 뜨거운 햇빛의 도시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추위는 단지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나라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고달픔이 답답하고 추웠던 것일게다.
지인의 소개를 받은 그 부부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2주후였다. 아들이 이곳 현대에 근무하고 있어서 은퇴지로 몽고메리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부부의 얼굴에는 편안함이 엿보였다. 몽고메리는 사면이 브릭으로 조성된 집들이 많아서 고풍스러운 외관을 가지고 있다. 대도시에 살다가 이곳에 와서 처음 집을 보는 사람들은 여유있게 자리잡은 대지위에 집장사 집이 아닌 개성있는 구조로 좋은 목재가 쓰인 집들을 보면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더구나 가격을 보면 감탄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볼 줄 알았던 생각과는 다르게 복병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두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 둘을 잘 키워낸 그들은 이민 1세대로 하루중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그로서리 사업으로 지금의 자금을 만드신 분들이었다. 많은 직종중에서도 그로서리 업종은 특히 성실과 근면이 없으면 유지하기 힘든 업종이었다. 한평생 끊임없는 몸놀림으로 살았기에 은퇴후엔 넓은 집에서 쾌적하게 지내고 싶다는 바램을 가진 부인에 비해, 노년에 넓은 집은, 집이 아니라 짐이라며 자그마한 집을 선호하는 남편분과의 대립이었다. 이제 나머지 삶은 호사스럽더라도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부인에 비해 남편은 있던 짐도 줄이고 생활도 간소화시켜 언제든 가볍게 떠나도 되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다는 바램이었던 것이다. 젊은이들 같은 날카로운 대립이 있었던건 아니지만 두분의 왼고한 고집에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두사람의 생각을 찬찬히 곱씹어 보았다. 한평생 궂은 일로 밤낮없이 뛰어다니는 이민 세대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낯설고 물설은 곳에서 굳굳이 자신의 몫을 다 해내고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그 항변에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하지만 많은 소유에는 더 많은 책임이 따른다는 세상이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노년의 나이다. 항아리 속 물건이 탐난다고 꼭쥔 주먹을 펴지 않고 항아리을 달고 다니는 어리석은 원숭이가 될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두 의견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 오기로 결정할 때에 겪은 많은 이견들이 생각났다. 10년을 넘게 살아온 곳을 떠니는 일이 어찌 쉬웠겠는가. 하지만 합리적인 이유를 가진 각자의 생각에는 서로 다르긴 해도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가 들어 있음을 느꼈다. 누구의 생각이 틀리고 누구가 맞다가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들이 서로의 빈 부분을 채워주는 합리적인 결정으로 거듭나는데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이 시간이 그분들에게도 서로의 빈부분을 채워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래본다. 어떤 결정을 하시던 서로의 향기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삶의 한부분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