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빛을 처음 본 날
오는 진자리는 윗목이었다
둘째 딸로 태어나서
9년 만에 얻은 첫 아들인 아버지
금강산에 가서 기도한 할머니 덕에 쫒겨나지 않은 어머니
그 후 딸 셋을 더 낳고 막내 아들을 낳은 집 장남
그들과 열일곱에 헤어졌다
공부 잘한 아들이 농사짓는 모습이 싫어
전 재산인 가축을 판돈과 쌀자루를 안겨주며
대처로 가서 공부를 하라는 엄마의 명을 받고
아버지 모르게 떠난 황해도 옹진
평생 엄마와 장남은 무언의 원망과 희망과 한을 품고
당신의 환경 때문에 눈길을 가둔 둘째 딸을 위해
중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 가둔 기억이 미안해서
버스를 타고 같이 오면서 처음 하던 말
‘네가 아들로 태어나면 좋았을 텐데’
반가움이 설움으로 뒤바뀌어 한 마디도 못했다
아버지와 둘째 딸이 처음으로 애증의 씨를 뿌린 날
가끔씩 비상금이라고 하며 가방에 넣어놓은 돈
남동생 둘을 본 엄마는 장남의 부실에 온 신경을 쓰고
2년 터울이 채 안된 둘째 딸은 늘 변방인 다락방에서
홀로 하모니카를 부르며 책에다 마음을 담았다
책 속에 미쳐야 둘째의 설움을 잊는다
티코라는 이름을 지은 일기장에 글을 쓰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충격을 받아
날아다니는 벌레가 되고 싶기도 했던 사춘기
고등학교 졸업 선물로 광화문 비제바노에서
긴 부츠를 사준 기억만 안고 살다가
결혼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이민을 가던 날
‘네가 없어서 심심해서 어떻게 살지’ 아버지의 여운이 오래갔다
좋아하는 두 아들과 살림 밑천인 딸 하나가 있는데…..
시민권을 받자 평양 좀 갔다 오라는 주문
공군사관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을 뒤로한 불안을 안고
평양을 거쳐 황해도 해주를 간 가족 상봉
대서특필 노동신문에 난 기사(미국에서 효녀가 왔다)
두려움이 두 아들의 얼굴과 함께 고통으로 다가온다
아버지의 한은 풀어드렸다
“네가 아들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지날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지문처럼 보인다
고향에 한 번 못 가고 서울에서, 가는 진자리를 맞은 아버지
난 오늘 처음으로 당신이 왜 아들로 낳지 딸로 낳았냐고
허공에 대고 소리쳐 물어보자 소금 같은 짠 눈물이
입 안으로 스며든다. 눈물을 훔치자 미래의 내 자리인
가는 진자리가 궁금해진다
(2023년 6월 아버지날에)
시인 약력
▶강화식(미국명 샤론 권)
필명 연선(娟仙). 애틀랜타 연합 시니어 문예창작 교실(글여울) 강사. 2007년 미주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 문학세계 수필부문 신인상. 제3회 해외풀꽃시인상. 한국 미래문학 시부문 신인상. 애틀랜타문학회 부회장 역임. 시집 ‘텔로미어(꿈 꾸는 시앓이)’ 등. hwashik219@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