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에 명동성당에서 한국 가톨릭 미술협회 그룹전을 했었다. 미주작가들도 참석하게 되어서 나도 함께 작품을 보냈었다. 서울 사는 친구에게 전시 소식을 알려주고 명동 성당 가게 되면 작품들을 한 번 보라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내 그림은 못 찾았고 성은 다르지만 이름이 같은 작품은 봤다고 했다. 아차! 미국 와서 내 성이 남편 성으로 바뀐 걸 이야기하지 않았구나.
문득 너의 이름은 뭐야? 내게 물어본다. 관계속에서 불리어지는 수많은 호칭들이 있다. 숙모, 고모, 이모부터 아이들의 엄마, 누구의 아내, 성이 바뀐 이름, 성당에서 부르는 세례명, 학생들이 불러주는 호칭까지 다양하다. 내가 불리고 싶은 이름은 어떤 것인지, 어떤 이름이 가장 익숙한 내 이름인지를 생각하다 보니 ‘엄마 이름’이라는 유은경 님의 시가 생각났다.
“친해 보이는데도 엄마들은 왜 서로 이름을 안 부를까?/ 앞집 아줌마는 언니라 하고/ 내 친구 엄마는 미나 엄마, 슈퍼마켓 아줌마는 엄마를 천사호라 부른다/ 내 이름속에/ 우리집 1004호 뒤에 숨은 엄마 이름/ 낯선 사람이 부른다/ 시원시원하게/ 유은경씨, 택배요!” 공감이 가는 시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띠었지만 뭔 지 모를 짠한 여운이 느껴진다.
신혼 초에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가 시어머님께 소리를 들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결혼했으니 호칭을 바꾸라고 하셨다. 그 이후로 나는 어색함에 남편을 가능하면 부르지 않으려고 애썼다. 꼭 필요 할 때 모기만한 소리로 여보라고 불렀던 생각에 웃음이 났다. 남편도 그 날 이후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여보, 하고 넉살 좋게 부르더니 지금까지 남편에게 내 이름은 여보다. 아가, 하고 부르던 시부모님은 아이가 생기면서 에미야, 하고 부르셨다. 이웃사람들은 00 엄마라고 불렀으며 슈퍼마켓 아줌마는 00호 어머니라고 불렀다. 전시장에 가면 내 이름 석자가 당당하게 불렸다.
한국 사는 동안은 내 이름 석자를 쓸 기회가 많았었고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도 많았다. 다양한 호칭으로 불려지는 내 이름은 나의 역할놀이처럼 자연스러웠던 것 같았다. 다양하게 불러주는 이름만큼이나 활동도 많았고 에너지도 넘치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미국으로 이사를 한 뒤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40대 접어들며 중년이란 타이틀의 무게감에 나의 마음은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흔들렸고 적잖은 몸살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불렸던 많은 이름들이 줄어들었고, 불러주는 이 없는 나의 이름도 함께 몸살을 하는 듯 숨죽이고 있었다. 사춘기도 흔들림 없이 잘 지나왔던 내가 사십 대에 톡톡히 몸살을 앓았던 기억이다.
중년의 몸살을 지나오며 새로운 곳에서 나는 또 다른 이름들을 만들며 살고 있다. 이곳의 친구들은 나이가 들어서 새롭게 만든 인연이다 보니 편하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거의 없다. 각자에 맞는 다른 호칭들이 익숙한 이름처럼 불리고 있다. 아주 자연스럽게. 하지만 어릴 적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좋아했던 친구 같은 감정을 찾기는 쉽지 않다. 서로가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얼마 전 친구와 아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친구가 다정하게 불러주는 내 이름이 훅 하고 가슴속으로 들어와 울렸다. 마치 잃어버린 소중한 물건을 찾은 것처럼 반갑기도 했지만 뜻 모를 감정이 나의 마음속을 맴돌았다. 엄마가 내 이름을 불러주던 목소리가 떠올랐고, 친구가 오랜만에 불러주니 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에 잠시 울컥했던 것 같다. 세월에 묻혀 쌓인 먼지를 훅 하고 날려 보내니 잊었던 이름들이 하나 둘 보였다. 내가 사랑했던 많은 이름들은 불빛처럼 하나씩 반짝이며 켜졌다가 꺼졌다.
너의 이름이 뭐야? 하고 다시 내게 물어본다. 뭘 하나 골라서 답하기엔 이유가 많다. 딱히 불러줬으면 하는 이름도 없지만 상대에 따라서 다 다르니 중요한 것도 아니다. 하나였던 이름이 늘어나면서 그 역할도 많아졌다. 부르는 이름에 따라서 사람과의 관계도 다르다. 숱한 호칭들이 내 이름처럼 불리어지고 나는 자연스럽게 대답을 한다. 이제는 하나가 더 늘었다. 할머니, 할머니라고 불리어도 자연스러운 나이가 되고 보니 고집스럽게 주장하던 나의 모난 자아도 세월만큼 깎여서 둥글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