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이슈 부각하며 지지층 결집 시도…트럼프 등 공화당은 소극적
임신 6개월 전까지 여성의 낙태 권리를 보장한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이 연방대법원에서 폐기된 지 1년이 지난 가운데 후폭풍이 계속되고 있다.
낙태권 문제는 미국 내 보수-진보 진영 간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는 이슈로 다뤄지면서 내년 대선에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그동안 공화당이 장악한 주(州)에서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이 줄줄이 제정되면서 여성의 낙태권은 크게 축소됐지만, 낙태가 합법적인 지역에서 시술받거나 낙태약(임신중절약)을 복용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
◇ 미 25개주, 가임기 여성 2천500만명 낙태권 축소
미국 연방 대법원은 지난해 6월 24일(현지시간) 임신 6개월 전까지 여성의 낙태를 합법화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했다.
1973년 내려진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여성의 낙태 권리가 미국 수정헌법 14조상 사생활 보호 권리에 해당한다고 봤지만, 지난해 보수 성향이 짙어진 연방 대법원은 “헌법에 낙태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그런 권리는 헌법상 어떤 조항에 의해서도 암묵적으로도 보호되지 않는다”며 낙태 허용 여부를 각 주에서 정하게 했다.
이에 따라 앨라배마주, 아칸소주, 아이다호주, 루이지애나주, 미시시피주, 미주리주, 사우스다코타주, 테네시주, 텍사스주 등에서 기존에 제정된 낙태 전면 금지 법안을 발효시켜 시행했다.
또 노스다코타주, 오클라호마주, 웨스트버지니아주는 새로 법을 제정해 낙태를 전면 금지하기 시작했다.
조지아주에서는 임신 6주, 네브래스카주는 임신 12주, 애리조나주는 임신 15주부터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노스캐롤라이나주와 플로리다주는 낙태 금지 시기를 각각 임신 12주, 6주 이후로 종전보다 더 앞당기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현재 해당 법률을 두고 소송이 진행 중인 지역들까지 포함하면 모두 25개 주에서 낙태를 제한하는 법이 제정됐다.
AP통신은 미국에서 약 2천500만명의 15∼44세 가임기 여성들이 1년 전보다 낙태가 더 어려워진 환경에 처했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 전체 가임기 여성의 4분의1에 해당하는 1천750만명이 낙태가 전면 금지되거나 대부분 금지된 지역에서 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조지아 낙태 권리 시위자들이 5월14일 애틀랜타에서 전국적인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로이터
◇ 낙태 합법 주로 이동 ‘풍선효과’…낙태약도 확산
하지만 낙태를 금지하는 주 법률의 실효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이 낙태가 합법적인 인근 다른 주로 이동해 낙태 시술을 받는 일종의 ‘풍선 효과’가 나타나고 있으며, 경구용 약을 먹어 임신을 중절하는 사례도 크게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
WP는 미들베리대학의 케이틀린 마이어스 경제학 교수의 연구자료를 인용해 1년 전 연방 대법원의 판결 이후 낙태가 합법인 주에서 낙태시술 클리닉 16곳이 새로 문을 열었다고 전했다.
텍사스주 남부 샌안토니오에서 낙태시술 클리닉을 운영하던 78세 의사 앨런 브레이드는 민주당이 주의회 다수인 뉴멕시코주와 일리노이주의 경계 지역에 낙태 클리닉 2곳을 새로 열었다.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외곽에 있는 낙태 클리닉은 환자의 90% 이상이 텍사스에서 왔다고 브레이드는 말했다.
임신중절 약에 대한 관심과 수요도 높아졌다.
낙태가 금지된 주를 포함해 미국 전역 50개 주에 낙태약을 우편으로 배달하는 단체 에이드 액세스(Aid Access)는 지난해 5월 초 연방 대법원 판결 초안이 유출된 직후 30개 주에서 이전 대비 2배 이상의 약 배송 요청이 들어왔다고 AP에 밝혔다.
또 지난 4월 텍사스주 연방법원에서 경구용 낙태약 미페프리스톤에 대한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취소하는 판결이 나오고 전국적인 논란이 됐을 때는 에이드 액세스에 접수된 약 배송 요청이 60% 늘었다고 WP는 전했다.
루이지애나주의 경우 2020년 연간 7천400건이었던 낙태 건수가 금지법 제정 이후 월간 10건 미만으로 급감하는 등 공식적인 낙태 기록은 현저히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지만, 약을 이용한 낙태 등 비공식적인 낙태 건수는 상당히 늘었을 것으로 AP 등 미국 언론은 추정했다.
다만 다른 주에 가서 낙태 시술을 받을 때 드는 비용·시간을 감당할 수 없는 저소득층이나 낙태약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잘 모르는 청소년 등은 낙태권 제한 이후 어려움이 커진 것으로 전해졌다.
2023년 1월 13일 산타 테레사에 있는 뉴멕시코 여성 클리닉에 의료 낙태약인 미페프리스톤이 준비되어 있다. 로이터.
낙태 반대 운동을 주도하는 보수 진영에서는 금지법의 실효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낙태를 반대하는 의사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단체 ‘히포크라테스 의사 연합’이 지난해 11월 텍사스 연방법원에 FDA의 미페프리스톤 승인을 취소해달라며 제기한 소송은 1심과 항소법원을 거쳐 연방 대법원 심리를 앞두고 있다.
또 낙태 반대 단체인 텍사스 생명권리협회는 낙태약 관련 웹사이트 차단, 주법무장관에게 법 위반자 기소 권한 부여 등을 골자로 하는 추가 법안 마련을 주의회에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화당이 우위를 차지한 텍사스 주의회도 이런 추가 조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WP는 이를 “낙태 반대 운동의 최전선에 있는 공화당 의원들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WP는 또 이런 정서가 공화당이 주도하는 여러 주에서 확산하는 양상이라면서 낙태 문제가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고전하게 만든 주 요인으로 작용한 점 등이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했다.
◇ 민주, 대선 앞두고 낙태권 쟁점화…공화는 후보별로 엇갈려
민주당은 낙태권 폐기 판결 1년을 맞아 이 이슈를 다시 띄워 전면적으로 쟁점화할 태세다.
미 CBS 방송에 따르면 민주당 전국위원회(DNC)는 22일부터 뉴욕 타임스퀘어와 전국의 주요 선거 격전지에 낙태권을 주제로 한 광고판을 띄운다. 또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도 이런 광고를 집행할 예정이다.
DNC에 따르면 이 광고는 낙태권을 보호하려는 민주당의 노력과 낙태를 금지하는 공화당의 모습을 대비해 보여줄 예정이다.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낙태 문제가 펜실베이니아주, 미시간주 등 격전지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됐기 때문에 민주당 선거운동본부가 다음 대선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슈로 다룰 계획이라고 CBS는 전했다.
이 문제를 두고 공화당과 싸우는 데 앞장섰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오는 24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출산 여부를 결정할 여성의 권리를 주제로 연설할 예정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는 지난달 공화당이 주도하는 주의회가 낙태 가능 기간을 임신 20주에서 12주 이내로 단축하는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 민주당 소속 로이 쿠퍼 주지사가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주의회가 무력화했다.
여론조사 전문가 셀린다 레이크는 “사람들은 이 이슈의 힘이 약해질 것이라고 계속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이미 많은 교외 지역 여성들이 공화당을 떠나 무소속으로 이동했고, 젊은 유권자들은 앞으로 더 많이 민주당 지지자가 될 수 있다”고 AP에 말했다.
공화당 역시 낙태 이슈가 다시 대선에서 민주당 표를 결집하는 요인이 될 것을 우려하면서 관련 문제에 더는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 모습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같은 당내 경쟁자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주지사가 서명한 임신 6주 이후 낙태 금지 법안을 두고 “너무 가혹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공화당 경선에 출마한 팀 스콧 상원의원도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공화·사우스캐롤라이나)이 제안한 임신 15주 이후 낙태 금지 연방법안을 지지할지 여부를 놓고 고민하다 뒤늦게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공화당 대선 후보 가운데 낙태 금지 연방법안에 노골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힌 인물은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이 유일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