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치수(九龍治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다스린다는 의미다.
옛 선인들은 정월 초하루 그 해의 농사를 예측하곤 했다. 책력을 펴 놓고 십간십이지를 따지는 것이다. 이 가운데 득신(得辛)과 치수(治水)를 가장 많이 활용했다.
음력 정월의 첫 신일(辛日)이 초하루에 들면 일일 득신, 열흘에 들면 십일 득신이라 하여 그 해의 풍흉(豊凶)을 점쳤다.
또한 십이지 가운데 용날이 언제 들었는지를 보고 치수를 붙였다. 용이 많을수록 비 오는 날이 많고, 적을수록 비 내리는 날이 적다는 예보이다.
용이 많아도 화합이 되지 않아 서로 미루다가 비를 적게 내릴 수 있다. 따라서 구룡치수란 아홉 마리의 용이 서로 책임을 전가해 오히려 가뭄이 든다는 게 숨은 교훈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속담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 고사성어가 한 때 여의도 정가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지난 1997년, ‘행정의 달인’이라 불리던 고건 총리는 한 국회상임위원장 초청만찬에서 대권 도전 의사를 묻는 질문에 이를 인용, 뜻이 없음을 에둘러 말했다.
당시 대권주자들이 어지럽게 설치는 정치권을 날카롭게 비판한 것으로 해석되면서 인구에 회자됐다. 이후 언론에서는 대선 때 후보난립 상황에서 이 고사성어를 어김없이 인용한다.
그럼에도 곱씹어 보면 굳이 나쁜 것만이 아니다.
미국의 경우 대선 때가 되면 유력 정치인들이 앞다퉈 후보출마 선언을 한다. 그만큼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이는 전체주의나 왕정체제와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대권후보 주자들은 전국을 순회하는 예비경선을 통해 유권자로부터 최종주자로 낙점을 받게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 선거의 핵심이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구룡치수가 명분이 서지 않는 일로 싸우거나, 체면을 돌보지 않고 이익을 다투는 것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는 보통 시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가운데 최근 지구촌 한인사회에서는 제21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이하 민주평통) 지역협의회장 선정이 초미의 관심사다.
하필이면 미주지역의 경우 경쟁이 더욱 치열하다. 실제 애틀랜타 지역은 7명의 후보가 난립해 로비전을 벌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든 조직의 대권에 도전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조직차원에서도 잘 이끌어 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아닌 게 아니라 지역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한인회가 갈수록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것도 봉사하겠다고 나서는 인물들이 적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민주평통의 앞날은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우스갯소리로 미주한인사회에서 지역한인회장보다 민주평통 협의회장의 위상이 훨씬 높아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과연 지망자들이 자타가 공인하는 적합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하는 것이다.
석동현 민주평통 사무처장은 이와 관련, 최근 SNS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보수우파를 자처하면서도 서로간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과거 행적 비판과 끌어내기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만약 경쟁관계인 후보가 회장이 되면 협조하겠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대답을 주저한다고 토로했다.
밥상을 차리기도 전에 숟가락부터 먼저 든다는 의미다. 보수진영의 치명적 약점인 것은 당연하다.
민주평통은 대통령자문기관이다. 자문위원들은 모두가 사심을 버리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조국의 발전과 통일을 위해 힘을 쏟아야 마땅하다.
나아가 각 지역 한인조직과 함께 한민족 글로벌네트워크의 구심점 역할도 해야 한다.
협의회장에 뜻을 둔 자문위원들은 이에 따라 자신의 역량이 현정부의 통일정책의 성공을 위해, 또한 시대의 사명에 적합한지를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이전투구(泥田鬪狗)의 모습을 보여서는 모두에게 누가 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세대간 단절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다, 좌우이념 대립과 일부 인사들의 감투 욕심 등으로 분열된 미주한인사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