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17)
동네에서 제일 잘하는 야구팀에 선수로 뽑히고, 아빠가 나무 위에 작은 집을 지어주셨고, 귀찮게 하던 동생까지 캠핑을 떠나 최고로 행복한 여름을 맞이한 아이가 있다. “나는 정말 행복했어. 제러미 로스, 그 나쁜 놈이 우리 동네로 이사 오기 전까지는!” 이라고 말하며 벌레와 잡초와 돌멩이로 만든 음식을 짓궂게 바라보고 있는 아이와 나쁜 놈 목록에 이름을 올린 제러미 로스는 얼마나 나쁜 짓을 했을지 궁금해 하며 책을 펼쳤다.
그런데 제러미의 잘못이 너무 사소한 것들이다. 야구경기에서 주인공이 아웃당하는 것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었고, 트램펄린 파티를 열면서 주인공만 쏙 빼 놓고 초대를 한 정도이다. 미디어에서 왕따나 학교폭력 같은 무서운 사건을 자주 접하다 보니, 친구관계에 한참 예민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감정에 둔감해 졌나 보다.
아빠에게 나쁜 놈 목록에 대해 이야기 하자, 아빠는 자신도 어렸을 때 그런 목록을 만들었다며 게다가 나쁜 놈을 멋지게 무찌르는 방법도 알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나쁜 놈 파이’를 만드는 것이다. 돌멩이와 잡초와 씹던 껌까지 넣어 만든 끔찍한 파이를 먹게 될 제러미를 상상하지만, 아빠가 만든 파이는 너무나도 먹음직스럽다. 하지만 진짜 마법은 나쁜 놈과 단둘이서 하루 동안 시간을 보내며 엄청 친절하게 나쁜 놈을 대하고 난 후, 이 파이를 먹여야 나쁜 놈을 혼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너무나 싫지만 하루만 꾹 참으면 제러미를 평생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기대에 제레미네 집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고 나온 제레미의 떨떠름한 표정과 어색하게 감정을 숨기고 “나랑, 놀래?”하고 묻는 아이의 표정이 재밌다. 마법의 힘을 키우려 최선을 다해 친구를 배려하고 친절을 베풀다 보니, 제러미를 점점 이해하게 되고 이제 제러미가 나쁜 놈이 아니라 좋은 친구로 느껴진다.
드디어 제러미가 파이를 먹어야 할 시간, 주인공의 변한 마음을 모르는지 아빠는 웃으며 파이 위에 아이스크림을 듬뿍 얹어 주시고,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은 소리친다. 마법에 걸린 파이에는 독이 있으니 먹지 말라고. 하지만 아빠를 따라 제러미는 파이를 맛있게 먹는다.
조금 뻔하게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아빠가 만든 파이는 마법의 파이가 맞았다. 괴롭히던 친구가 사라지고 파이를 함께 나눠먹을 친구가 새로 생겼으니 말이다.
〈Enemy Pie〉라는 영어 그림책의 제목이 한국에서는 〈괴롭히는 친구 무찌르는 법〉으로 바뀌어 출판되었다. 호기심을 부르는 영어제목이나 조금 자극적이지만 내용을 잘 설명해주는 한국어제목, 둘 다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든다. 톡톡 튀는 짧은 문장과 아빠의 개구쟁이 같은 표정과 말투, 그리고 그런 아빠를 쏙 빼닮은 주인공의 표정과 말투가 이 그림책에 매력을 더한다. 친구를 미워하는 아이의 마음을 꾸짖거나 부정하지 않고 충분히 공감해 주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살짝 주는 아빠의 모습에서 참다운 어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인덕이 많으시네요.’라는 말을 한다. 인덕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쓰이는 말에는 인복이라는 말도 있다. 인덕이나 인복은 똑같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많이 받는 것을 뜻하지만, 인복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나 능력 있는 사람이 많을 때 쓰이고, 인덕은 주변에 도움을 주거나 필요한 사람이 오랫동안 머물도록 베풀고 헤아리는 덕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라 한다. 인복과 다르게 인덕은 스스로 노력하여 만들어 가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늘 인복이 많다고 말하는 나에게 얼마 전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인복이나 인덕이 많은 것이 능력이 아니라, 네가 가진 참 능력은 만나는 사람을 다 인복이라 믿는 것이야.” 곱씹어 볼수록 이 말이 맞다. 감정이 둔감해 그런지 웬만한 일로 마음이 상하지 않아 사람의 좋은 점만 보인다. 세상은 넓고 좋은 사람은 많으니, 이웃집 문을 두드리는데 망설임이 없다.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것이 인복을 받는 첫 번째 길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