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가 궁극적 목표” 에콜 노르말 음악원 최우수 졸업…한국서 9월·12월 공연 예정
“제 생에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청중 앞에서 연주한다니 너무 설레서 힘든 줄도 모르겠어요. 긴장된다기보다는 행복해요. 제 음악을 이렇게 많은 분과 공유할 수 있으니까요.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될 거예요.”
한국 피아니스트 이혁(23)은 프랑스 혁명기념일 ‘바스티유의 날’을 맞아 지난 14일(현지시간) 파리 에펠탑 아래서 펼쳐진 클래식 콘서트 ‘콩세르 드 파리’의 본격적인 시작을 앞두고 무대에 올라 독주 공연을 선보였다.
이혁은 이날 오후 8시 40분께 샹드마르스 광장에 마련된 무대에서 쇼팽의 ‘녹턴 올림 다단조’와 ‘영웅 폴로네즈’, 러시아 피아니스트 아르카디 볼로도스가 편곡한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 등 3곡을 20여분간 들려줬다.
그간 셀 수 없이 많은 콩쿠르와 공연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을 이혁은 이날 공연을 앞두고 연합뉴스 등 한국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나 많은 사람 앞에서 공연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기념일 기념 콘서트 무대에 오른 피아니스트 이혁
이혁은 “콘서트가 열리는 샹드마르스 광장뿐만 아니라 인근 도로에도 TV를 설치해 공연을 중계하기 때문에 35만명 가까이가 오늘 공연을 보게 될 것이라는 설명을 주최 측으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이날 콘서트가 끝나고 오후 11시부터 약 20분 동안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샹드마르스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파리 시청은 광장 내 보안 구역에만 7만명을 수용했다고 밝혔다.
이혁은 지난해 11월 프랑스의 권위 있는 음악 경연 대회 롱티보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공동 1위를 차지한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했고, 그 덕에 콩세르 드 파리를 앞두고 연주하는 기회를 얻었다.
올해로 제10회를 맞은 콩세르 드 파리는 매년 7월 14일 샹드마르스 광장의 에펠탑 바로 아래에서 파리시, 공영 프랑스 텔레비지옹 방송, 라디오 프랑스 등이 공동 개최하는 연중 최대 음악 행사 중 하나다.
이날 이혁의 연주는 공식 프로그램에 포함되지 않은 일종의 사전 행사였다.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이 무대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2020년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오페라(SFO) 음악감독인 지휘자 김은선이 이 콘서트의 총감독을 맡은 적이 있다.
프랑스 혁명기념일인 ‘바스티유의 날’을 맞아 지난 14일(현지시간) 파리 샹드마르스 광장에서 열린 클래식 콘서트 ‘콩세르 드 파리’ 시작을 앞두고 관객들이 피아니스트 이혁(23)의 연주를 듣고 있다.
롱티보 재단을 이끄는 제라르 베케르만 회장은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예술과 음악을 사랑하는 파리에 모이는 연례행사에 이혁이 초청돼 아주 자랑스럽고 행복하다”며 “그는 위대한 예술가”라고 치켜세웠다.
베케르만 회장은 “이혁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언제나 나눌 준비가 돼 있는 연주자”라며 “항상 친절하고 인간적이고, 호의적인 이혁이 건반 위에서는 거칠어질 때가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흥미롭다”고 덧붙였다.
특히 이혁이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하기 까다롭기로 소문난 러시아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선곡한 용기에 감탄했고, 또 그 곡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고 했다.
인터뷰하는 제라르 베케르만 롱티보 재단 회장
파리 에콜 노르말 음악원에서 2년짜리 최고 연주자 과정을 마친 이혁은 지난 5월 가장 우수한 졸업생에게 주는 ‘코르토 상’을 받았다. 코르토 상은 에콜 노르말 음악원을 설립한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의 이름에서 따왔다.
코르토 상 수상을 계기로 프랑스에서 발매할 음반 녹음을 준비하고 있는 이혁은 올해 하반기부터 내년까지 모나코 왕실, 베르사유 궁전 등에서 공연 일정이 잡혀있다는 소식을 전할 때는 얼굴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올해 9월 서울 금호아트홀에서 공연이 잡혀있고, 아직 장소와 시간은 정하지 않았지만, 작년에 이어 올해 연말에도 7살 아래 동생인 피아니스트 이효와 함께 기부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자선공연을 해보니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또 그것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게 너무나 뜻깊더라고요. 이건 제가 앞으로도 매년 계속 이어가고 싶은 프로젝트예요.”
피아니스트 이혁(23)이 지난 14일(현지시간) 프랑스 혁명기념일 ‘바스티유의 날’을 맞아 파리 샹드마르스 광장에서 열린 클래식 콘서트 ‘콩세르 드 파리’를 앞두고 대기실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이혁은 앞으로 에콜 노르말 음악원에서 더 높은 과정을 밟으면서 학업을 이어가는 한편, 쇼팽 콩쿠르를 계기로 소속사가 생긴 폴란드 바르샤바를 거점으로도 활동하며 다양한 청중들을 만날 계획이다.
궁극적으로는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이혁은 3살 때부터 시작한 바이올린으로도 청중을 만나고 싶다면서 “항상 음악 앞에 진실하고, 진솔하게 음악을 파고드는 그런 음악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2000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혁은 세살 때 처음 음악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2014년 러시아 모스크바로 이주해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 유학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지난해 4월 휴학계를 제출했다.
2012년 모스크바 쇼팽 청소년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혁은 2016년 폴란드 파데레프스키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우승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고, 2018년 일본 하마마쓰 콩쿠르에서도 3위로 이름을 올렸다.
2021년에는 세계 최고 권위의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결선에 올랐으나 순위권에 들지 못했고, 같은 해 12월 프랑스 아니마토 콩쿠르에서 우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