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은 정전협정 체결 후 유엔과 북한측 공동경비구역(JSA)으로 정해진, 동서 800m, 남북 400m의 장방형 공간으로 남북한 쌍방간의 행정관할권 밖에 있는 특수한 지역이다. 서울에서 서북쪽으로 62km, 평양에서 남쪽으로 212km, 그리고 개성에서는 10km 떨어진 곳에 있는 판문점은 항상 긴장감이 감도는 위험한 곳이다. 가끔 물리적인 충돌도 일어나고 총격전도 벌어진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은 1970년대 후반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판문점도끼만행사건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인근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인민군 30여 명이 도끼를 휘둘러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주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주한 미군 과 국군 장병들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45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처. 유엔사 경비대장 아더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럿 중위, 한국군 대위 한 명이 7명의 경비병력과 한국인 근로자 5명을 인솔하여 제3초소 옆 12m 지점에 커다랗게 자란 미루나무 주변에서 가지치기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군 장교(후에 박철 중위로 밝혀짐)가 병력을 이끌고 현장에 나타나 시비를 걸었다. 보니파스 대위가 “합법적 절차를 거쳐 절단하는 것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면서 항의하자 박철 중위가 “이놈들을 죽여!” 하고 외쳤다. 이를 신호로 인민군이 몽둥이와 쇠꼬챙이로 보니파스 대위를 공격했다. 그들은 한국 근로자들이 버리고 달아난 벌목용 도끼 뒷머리로 보니파스 대위의 얼굴을 여러 차례 내리찍었다.
국방부로부터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당장 내 군화와 철모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박정희는 1·21 청와대 습격사건,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미 정보기(EC121) 격추사건 등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강력한 보복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이런 비극이 발생한 것”이라며 “이번 기회에 강력한 보복 조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여기서 우리는 북한이 끔찍한 도끼만행 도발사건을 저지른 시기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1969년 발표된 ‘닉슨 독트린’의 후폭풍으로 베트남 패망, 캄보디아 공산화, 주한미군 철수로 인한 동아시아에서의 세력 균형의 파괴는 미국 내에 큰 충격과 상처를 줬다. 이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미국 지도부는 태평양 중시 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1975년 11월 11일 헨리 포드 대통령은 “태평양 연안국의 일원으로서 아시아에 절대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선언했다.
다음 해인 1976년 1월 27일 럼스펠드 신임 미 국방장관은 취임 후 처음 발표된 국방백서에서 “미국 안보의 필수적인 힘의 중심 지역은 서구, 즉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동북아, 즉 일본과 한국”이라고 지적하고, “한반도에서 미 지상군을 철수시킴으로써 미국이 지난 20년간 유지해 왔던 동북아의 안정을 위협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주한미군 철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태평양 중시 전략에 재를 뿌린 인물이 미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지미 카터 전 조지아 주지사였다. 그는 선거공약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들고 나왔다. 김일성은 카터의 대통령 후보 지명,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크게 고무되어 카터의 후보 지명 한 달도 안 된 시기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백주에 도끼로 미군 장교 두 명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8월 21일 아침 7시. 한미 양국군이 데프곤 2(공격준비태세)에 돌입한 가운데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작전에 나섰다. 포드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중무장 헬리콥터, F-4 팬텀 전폭기, F-111 전폭기, 괌에서 날아온 B-52 전략폭격기가 4중으로 판문점 상공을 경비하는 가운데 미군 장교의 지휘 하에 16명의 작업반과 이를 경비·근접 지원하기 위해 태권도 유단자로 구성된 64명의 국군 특전사 정예요원, 1사단 수색대가 투입되었다. 주한 미 2사단장은 헬기를 타고 상공에서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판문점 공동경비지역 남쪽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즉각 전투에 투입하기 위해 미 2사단 장병이 탑승한 20여 대의 헬기가 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한국 해역에 진입한 미 항모 미드웨이호는 함재기를 띄웠고, 항모 내에는 즉시 투입 준비가 완료된 해병부대가 대기 중이었다. 드디어 미루나무 절단 작전이 개시됐다. 7시 20분께 북한 병사 200여 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건너편에서 사진만 찍을 뿐 도발행위를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당시 김일성은 인민군 부대에 “도발하지도 말고, 도발에 걸려들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엔사가 발족한지도 73년의 세월이 흘렀다. 유엔사는 제 2의 한국전쟁에 대비하는 한미일 군사관계의 핵심축이다. 유엔사는 정전협정의 준수를 감시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북한이 정전협정을 위반하는 도발을 할 때마다 유엔사가 나서는 이유다. 유엔사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통과 출입허가권을 갖고 있다. 미국은 유엔사를 진화시키고 활용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우리 사회 일부 에서는 미묘한 시각차를 보이는 것 같다. 이것이 북한의 유엔사 무력화나 해체 주장에 힘을 싣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중국 그리고 북한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우리의 지정학적 현실을 생각해 보면, 유엔사 기능이 축소되거나 유엔사가 해체될 경우 우리의 안보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6·25 전쟁 당시에도 그랬지만 북한이 핵무기로 우리를 위협하는 현재 상황에서 유엔사가 제대로 기능을 수행해야 우리의 안보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 유엔의 기본 정신은 평화와 자유 수호이고 유엔사는 이를 한반도에서 구현하는 기관이다. 우리나라는 유엔사를 수용한 수용국으로서 우리의 미래 비전을 지원할 수 있는 유엔사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유엔사를 민족 자결을 제약하는 족쇄가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 통일로 가는 열쇠로 만들어야 한다. 올해는 6. 25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