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에선 ‘장로(長老) 정치(gerontocracy)’라는 단어가 화제다. 미국 상·하원엔 80~90대 고령에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의원이 20명을 넘어서면서다.
최근 인지 능력이 다소 둔화한 듯한 이들의 모습이 TV 등을 통해 적나라하게 노출되면서 일각에선 정치권에 ‘나이 상한제’를 도입해 일정 연령이 넘으면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반면 고령 정치인들의 경륜을 활용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80대 이상 의원 21명…’장로정치’ 논란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미국 의원의 평균 연령은 2000년대 들어 계속 상승하고 있다. 현재 평균 연령은 상원 65세, 하원 58세다.
‘의원의 고령화’를 이끄는 80대 이상 의원은 총 21명으로, 전체 의원(535명) 중 약 4%다. 지난해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평균 은퇴 연령은 61세다. 그에 비해 이들 정치인들은 20년 넘게 더 일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인 고령화’에 관심이 쏠린 건 내년 11월 열리는 미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각각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 경선에 나서면서다. 81세인 바이든과 77세인 트럼프가 각 당의 대선 후보가 되면 이번 대선은 ‘최고령 리턴 매치’가 된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여러 번 넘어지거나 말실수가 잦아 건강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정치 경력이 평균 45년이 넘는 베테랑 정치인 다이앤 파인스타인(90·민주당) 상원의원과 미치 매코널(81·공화당) 상원의원의 최근 행동이 나이 논란에 불을 지폈다. 파인스타인 의원은 지난달 말 상임위원회 투표를 요청받았는데 계속 법안 낭독만 이어갔다. 민주당의 다른 동료가 “그냥 ‘예(yes)’라고 말하세요”라고 하자,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예”라고 했다.
매코널 의원은 지난달 말 기자회견에서 TV 카메라 앞에서 20초 동안 말을 못하고 얼어붙은 모습을 보이다 부축을 받고 퇴장했다. 두 의원의 이런 모습에 소셜미디어(SNS)에서 ‘장로정치’가 검색어로 등장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바이든과 트럼프가 내년 대선에 출마를 선언하면서 나이 문제가 논란이 된 와중에 파인스타인 의원과 매코널 의원의 이상 행동까지 나와 장로정치에 대한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고 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6월 1일 미 콜로라도주 공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연설을 마치고 이동하던 중 넘어지고 있다.
일각에선 ‘나이 상한제’를 도입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고령이 되면 정치 활동을 제한하자는 것이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유고브(YouGov)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1000여명 중 과반이 선출직 공무원의 연령 제한에 찬성했다. 구체적으로 몇 살로 제한할 지에선 의견이 엇갈렸다. 노스다코타주(州)에서는 한 보수 성향 운동가가 임기 말까지 81세가 되는 것을 기준으로 의원직을 제한하자는 청원을 벌이기도 했다.
임기를 최대 18년으로 제한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미 상원은 6년, 하원은 2년이 임기다. 즉 상원은 최대 3번, 하원은 최대 9번 선출될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나이 상한이나 임기 제한 등은 헌법을 개정해야 해 실제 도입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지워싱턴대의 게리 노들링어 정치학 교수는 “하원의장, 원내대표 등 중요한 자리에만 정년을 설정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개혁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75세 이상의 정치인을 대상으로 인지력 검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공화당 후보 경선에 출마한 니키 헤일리 전 유엔 주재 대사는 “미국은 전성기를 지난 것이 아니다. 미국 정치인들이 전성기를 지났을 뿐”이라면서 “75세 이상 정치인은 정신 능력에 대한 검사를 의무적으로 진행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 모두를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됐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치매 전문가 트레이시 캐롤은 “대부분 특정 연령에 도달하면 인지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고 NYT에 전했다. 다만 “파인스타인 의원이나 매코넬 의원처럼 (인지 능력 둔화의) 징후가 있는 경우에는 신경심리 검사를 해 전반적인 업무 수행 능력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스스로 판단해 제때 물러나야”
반면 고령 정치인의 경험이 국정 운영에 중요하다는 반론도 나온다. 여러 임기를 거쳐 제도적인 지식이 풍부하고, 법안 통과에 필요한 사회적 관계를 효과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설명이다. 래리 사바토 버지니아대 정치연구소장은 “사람들은 연공서열과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고 지적했다. 제레미 폴 노스이스턴대 법학교수는 “경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없다”고 말했다.
미국 현역 의원 중 최고령인 다이앤 파인스타인 상원의원이 지난 7월 12일 미국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유권자들도 정작 투표할 때는 정치인의 나이를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 콜로라도 볼더대의 온라인 설문 결과,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 유권자 대부분이 23세, 50세, 77세 후보를 똑같이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이보다는 정당·인종·성별과 특정 이슈에 대한 입장 등이 투표에 더 많이 영향 준다는 설명이다.
아예 정치인 스스로가 자신의 건강 등을 파악해 제때 진퇴를 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지난해 말 낸시 펠로시(83) 전 하원의장, 스테니 호이어(84) 전 원내대표, 짐 클리번(83) 전 원내총무 등 고령의 민주당 하원 지도부가 전원 사퇴한 것이 좋은 예다. 앞서 논란이 된 파인스타인 의원도 내년 11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시카고대의 존 마크 핸슨 정치학 교수는 “이는 미 정계에서 매우 이례적이고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현재 한국은 대통령, 국회의원 등 주요 선출직 공무원 중엔 80대 이상은 없다. 다만 국회의원의 경우 60대가 약 절반에 이르고, 사회 추세에 따라 고령화할 것으로 보인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미국, 한국 모두 경력이 많은 고령의 정치인은 물러나길 꺼리고, 20~30대의 젊은이들은 더 많이 기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크다”면서 “지혜로운 노인과 역동적인 젊은이가 공존하는 정치 환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소영 기자 park.soyoung0914@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