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때 묻은 낡은 가방이 캔버스 속에 덩그러니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밑그림만 그려진 미완성 작품이지만 그림 속의 가방은 힘들고 외로워 보였다. 그림 그리던 그 당시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느껴졌다.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시작할 때는 그때의 감정들이 색과 터치와 전체 분위기 속에 고스란히 묻어져 나온다. 무겁고 우울하게 다가오는 그림을 보고 있으니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완성하지 못하고 묵혀 두었던 마음이 느껴졌다.
처음 미국 와서 지내면서 언어에 대한 두려움과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에 힘들었다. 속내를 나눌 수 있는 친구도 가까이 없다는 것이 외롭게도 만들었다. 삶의 현실 앞에 나는 용감한 척하며 엄마, 아내로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다. 바쁘게 활동하던 모임들도, 작품전도 갑자기 사라졌다.
혼란스러운 그때 많은 것들을 정리한 최소한의 짐들이 한국에서 왔다. 짐 정리를 하면서 꺼낸 이 가방을 보는 순간 울컥함이 올라왔다. 특별한 사연이 있는 가방도 아니다. 나와 많은 것들을 함께 한 그 낡은 가방 속에 들어있는 시간과 추억들이 떠올라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이 가방을 그리다 만 상태로 이십 년 가까이 벽장 속에서 잠자고 있던 것이다.
오래전 일이다. 남편은 가끔 출장 다녀오는 길에 면세점에서 가방을 사서 내게 선물했었다. 그 당시에 난 명품이란 걸 모르기도 했지만 디자인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분명 잘 들지도 않을 가방들을 비싼 돈을 주고 사 왔다는 것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시큰둥한 내 반응에 남편은 때로 실망하기도 했다.
어느 날 나를 백화점으로 부른 남편이 마음에 드는 가방을 직접 골라 보라고 했다. 내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궁금했나 보다. 그림 속에 들어 있는 가방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한동안 많이 들고 다녔던 손때 묻은 가방이기도 하다. 슬프게도 지금은 그 가방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그림 그렸을 당시의 우울했던 내 마음은 알 수 있다.
가방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이사를 자주 한 나는 이삿짐을 쌀 때마다 짐을 줄이고 낡은 것들을 정리해 왔다. 내 성격상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지만 잦은 이사는 어쩔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정리하게 했다. 그때그때의 감정들에 따라서 쉽게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쉽게 정리 못하는 것들도 많았다. 쉽게 버렸을 것 같지 않은 이 가방의 행방을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딘 가에 버려졌을 그 손때 묻은 추억이 그리움으로 피어났다.
이사 올 때 여유가 많았던 벽장에는 물건들이 하나 둘 쌓여서 짧은 시간에 선반 위까지 채워지고 있다. 옷장도 마찬가지고 책상 위나 서랍도 숨 쉴 곳이 줄어들고 있다. 심플하게 살 자고 하면서도 행동은 마음과 달리 열심히 하나씩 채워가고 있다. 가을이 오기 전에 대청소를 다짐해 본다.
짐들을 정리하면 마음이 개운 해진다. 마음속 케케묵은 감정들을 정리하면 삶이 한층 더 가벼워지고 행복해짐을 느낀다. 무겁고 힘들어 보였던 그림 속 가방도 연륜이 느껴지는 지난 추억으로 다가오는 걸 보면서 마음도 편해졌다.
오랫동안 외면해 온 이 그림을 이젤 위로 옮겼다. 당장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면서도 쉽게 붓을 들지 못하는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다른 느낌으로 끝이 날 것 같아 망설여지기도 한다. 하나의 보기 좋은 정물화로 마무리될 것 같아서 이다. 나의 감정과 이야기가 빠져버린 영혼 없는 그림으로 완성되는 건 원치 않는다.
힘들었던 시간들도 내 삶의 일부다. 지워서 없애기보다는 내 삶 속에 잘 버무려서 인생의 한 막을 만들며 쌓아가는 것이다. 삶 속에 스며든 온갖 색들은 한층 더 깊어지고 성숙해진 모습으로 농익은 자화상을 그려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