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임신을 거쳐서 아이를 낳은 작은딸네에서 나는 쉬지 않고 이것저것 하느라 바빴다. 딸네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부엌을 완전히 개조하고 아래층 카펫을 모두 마루로 바꾸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시일이 오래 걸렸다. 드디어 그 일은 아이를 출산하기 전날에 끝났다. 그러니 부엌살림은 온통 2층에 흩어져 있었고 오랫동안 부엌을 사용하지 못한 집안은 난장판이었다. 딸자식의 편안을 우선해서 팔 걷어 부치고 일하니 딸이 “한국계 엄마는 자식에게 무조건 봉사하는 희생정신이 있나?” 하며 친구들의 엄마들은 나와 좀 다르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세상을 떠난 내 어머니가 생각났다. 생전에 내 어머니가 하신 대로 내가 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손자의 출산이 기쁘다면서 사돈네가 전화를 했다. 화상통화라서 사돈부부는 내가 부엌에서 일하는 것을 봤다. 언젠가 한국계 지인으로부터 들은 말이라면서 “딸을 가진 엄마는 딸네에 가면 부엌에 서서 밥을 먹고, 아들을 가진 엄마는 식탁에 앉아서 며느리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다” 하더니 내가 진실로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니 그들은 깔깔 웃었다. 그리고 10월달에 손자들 보러 미국 방문할 비행기표를 샀다고 했다.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키운 딸은 오히려 요리를 잘하는 시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 며느리가 아닌가. 그러고보니 어차피 동양이나 서양의 부모는 자식을 위해 헌신하기는 마찬가지다.
3살짜리 손주가 학교를 가고 나면 대충 딸아이 먹을 음식을 챙겨주고 나는 잠시 외출을 했다. 딸네가 사는 매리에타를 중심으로 매일 낯선 지역인 로즈웰, 샌디 스프링, 케네소의 명소를 찾아다니며 두리번거렸다. 내가 선호한 길은 주로 대로가 아닌 뒷길이었다. 차분하고 안정된 환경에 숲이 우거진 곳이나 나무가 많은 지그재그한 길이 재미있었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휘어진 도로에서 불쑥 나타나는 차들에 화들짝 놀라서 사고가 날 뻔한 후로 특히 조심한다.
확 터인 평지에 숲이나 나무들이 별로 없는 앨라배마 지형에 익숙하다가 숲속 여기저기 들어선 주택가와 상가를 둘러보며 내가 사는 동네처럼 이곳에 익숙하고 싶었던 욕심은 나를 나그네로 만들었다. 더위를 반가워하며 낯선 방향으로 운전해 다니다가 멋진 성당을 찾았고, 귀여운 커피하우스에서 쉬었다가 다시 새로운 골목길을 헤매고 다닌 나는 분명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애틀랜타 북서쪽의 작은 도시들과 친해지고 이제는 어디로 가든 통하는 길에 적응되어 간다. 도시의 편리와 시골의 여유를 함께 가진 이 지역의 상황이 마음에 든다.
멋진 분위기의 휴식처인 프랑스식 베이커리 카페, 더구나 동양식 베이커리 카페에서는 내 눈과 입이 즐거웠다. 음식점도 입맛대로 기분 따라 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해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는다. 무엇보다 내 사는 지역에 없는 서점에서 아이들 책을 고르다가 많은 신간들 중에 크고 두툼하며 멋지게 장정된 13세기 이란의 시인이며 신학자인 루미의 시집을 찾은 기쁨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의자에 앉아서 몇 페이지 시를 읽은 후 바로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반쯤 이곳 사람이 되었다가 앨라배마 집으로 돌아가서 몽고메리 시장 선출 투표를 했다. 누구를 지지하는지 확신이 없었지만 내 의무를 했다. 며칠 쉬고 이번에는 남편과 함께 딸네로 왔다. 아이들 소란에 정신없다는 남편의 행복한 불평도 여기저기 맛집에서 만족으로 바뀌었다. 딸네들 집에는 우리방이 있다. 편하게 찾아와서 손주들의 재롱을 즐기니 좋다. 새로 이사한 집의 우리방에 들여놓을 침대의 매트리스를 딱딱한 것으로 원하는지 부드러운 것으로 원하는지 물어온 큰딸의 질문은 의미 있었다. 이제부터 딸네를 돌면서 한집에서 몇달 씩 묵자고 제안하니 남편이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우선 우리 부부의 건강이 유지되어야 가능하다. 직장과 생활에 바쁜 딸들이 우리를 전적으로 돌 봐줄 시간과 정신적인 여유가 없다. 그러니 오래 살던 내 지역에 뿌리는 두고 간혹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계절 따라 바람 따라 다니면 된다. 어쩌면 이번 8월의 긴 나들이가 그 시작이다. 여름 나그네로 작은 딸네에서 머무니 가을에는 버지니아주의 숲속에 집을 가진 큰 딸네에 가서 뒤뜰에 찾아오는 사슴과 여우를 만나는 가을 나그네가 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