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남서부…둘루스서 3시간
유년시절 집과 다닌 학교 ‘보존’
선거운동 본부 건물도 그대로
오가는 길 박물관·공원도 볼거리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고향, 플레인스(Plains)를 다녀왔다. 조지아 남서부에 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애틀랜타 도심에서 남쪽으로 160마일 정도, 둘루스 한인타운에선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곳이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전적으로 카터 대통령 덕분이다. 무명의 땅콩 농장주가 일약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고, 이곳을 선거운동 거점으로 삼아 당선되면서 대통령을 배출한 마을이 됐기 때문이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선거대책본부로 사용되었던 플레인스 디포
카터 전 대통령은 대학(해군사관학교)과 군대 생활, 조지아 주지사 시절, 대통령 재임 기간을 제외하곤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1924년생인 카터 전 대통령이 올해 초부터 암 투병에 따른 모든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곳도 이곳이다.
조지아 출신의 유일한 대통령. 그가 자란 마을, 그가 다닌 학교, 그가 다녔던 교회를 그의 생전에 한 번은 가 보고 싶었다. 더 늦으면 안 되겠다 싶어 주말 아침 바로 차를 몰았다. 화씨 100도를 넘는 늦더위가 절정을 이루던 지난 주말이었다.
플레인스 가는 길, 남부 지역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넓은 목화밭.
#. 지미 카터의 일생
카터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의 후임이었던 현직 대통령 제럴드 포드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1976년 11월이었다. 취임 후 그는 바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했다. 주한미군이 북한을 자극해 한반도 평화에 위협이 될 뿐 아니라 미국의 전쟁 개입 위험도 커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 내외 심한 반발에 부딪혀 철수는 보류됐다.
카터는 또 재임 중 인권 외교를 강조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체제를 인권 침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당연히 한국과의 관계는 껄끄러웠다. 이런 이유들로 당시를 기억하는 한국 사람 중엔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꽤 있다.
선거대책본부였던 플레인스 디포 앞 건물
카터는 퇴임 후인 1993년 1차 북한 핵위기 때는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이 또한 한국엔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북한의 핵개발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과 남한에 있다는 식의 북한 입장만을 전달함으로써 ‘중재자’의 역할에 충실치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국인들 역시 재임 중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드물 정도로 재선에 실패한 것도 그의 인기가 얼마나 바닥이었는지를 짐작게 한다. 하지만 퇴임 후 평판은 완전히 달라졌다. 소탈한 생활과 서민적 행보로 어떤 전임 대통령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다. 평생에 걸친 인권 운동과 국제분쟁 중재 노력으로 2002년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플레인스고교 전시실
그는 한 달 뒤(10월 1일)면 만 99세가 된다. 한 인간으로서 그의 최대 미덕이라면 평생이 한결같았다는 점이다. 평화, 인권, 신앙 등에 대한 신념도 그랬지만, 90대 중반 나이까지 빠지지 않았던 주일학교 봉사나 77년간 해로했던 끝없는 아내 사랑 등 실천의 삶 또한 그랬다.
눈앞의 이해득실에 따라 평생 걸어온 자신의 과거를 헌신짝처럼 내팽겨쳐버리는 이들이 너무 많은 요즘 세태에 우직했던 그의 삶이 더욱 돋보이는 이유다. 지금도 그 먼 시골 플레인스까지 방문객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이유 역시 이것일 것이다.
조지아 비지터 센터
# 대통령의 고향 마을
플레인스 일대는 현재 국립역사공원(National Historical Park)으로 연방 차원에서 관리되고 있다. 공원으로 지정된 곳은 카터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옛집과 농장, 카터 부부가 졸업한 플레인스고등학교, 대통령 후보 당시 선거운동 본부로 사용된 철로 옆 건물, 그리고 현재 대통령 부부와 가족이 사는 집과 향후 묻힐 묘지 등이다. (이 중 현재 사는 집은 일반에게 공개하고 하지 않고 있다.)
지미 카터 대통령과 함께한 필자. 플렌인스 입구 조지아 방문자센터에 있는 실물 크기의 인형이다.
둘루스 한인타운을 출발한 지 4시간여 만에 플레인스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린 것은 중간에 앤더슨빌 전쟁 포로 박물관을 잠시 들렀기 때문이다.
플레인스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방문자센터가 있는 옛 플레인스고등학교(▶주소: 300 N Bond St. Plains, GA 31780)였다. 카터 부부가 다녔던 이 학교는 전체가 뮤지엄으로 꾸며져 기념관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재학시절 학교 모습과 카터의 일생을 시기별로 정리해 놓은 전시물도 볼 수 있다.
지미 카터 역사공원 방문자센터가 있는 옛 플레인스고교. 내부는 전체가 지미 카터 관련 뮤지엄으로 꾸며져 있다.
이어 선거 캠프로 이용했던 철로 변의 허름한 플레인스디포 건물(▶주소: 107 Main St. Plains, GA 31780)도 가 보고 주변의 기념품 가게도 기웃거려 보았다. 모두 차로 한 두 블록 거리에 있어서 걸어서도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곳들이다.
카터 후보의 선거운동 본부로 사용된 철로변 플레인스 디포 건물
플레인스 디포 건너편 기념품 가게들
유년 시절을 보냈던 집과 농장(▶주소: 402 Old Plains Hwy. Plains, GA 31780)은 다운타운에서 2~3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소년 카터가 생활했던 어린 시절 방과, 온갖 집기 비품, 농기구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1930~40년대 미국 남부 농촌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과 농장 입구
카터 대통령이 어릴 때 살았던 집
소년 카터의 방엔 침대와 책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이 평생 다녔던 마라나타 침례교회(▶주소: 148 GA-45, Plains, GA 31780)도 가 보았다. 카터는 2019년까지 이곳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했는데, 매주 일요일이면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전국 각지에서 이 교회를 방문했다고 한다. 찾아간 날은 토요일이라 그런지 문이 굳게 잠겨있어 들어가 보진 못했다.
카터 전 대통령이 다녔던 마라나타 침례교회. 카터는 2019년까지 이곳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플레인스를 둘러보면서 뭔가 대단한 볼거리를 기대하고 이곳을 찾는다면 살짝 실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적지치고는 아직은 많이 허름하고, 눈에 띄는 ‘랜드마크’같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지아 살면서 평생 선한 영향력을 끼친 ‘큰 어른’의 발자취를 더듬어본다고 생각하면 한 번은 와 볼 만한 곳, 아니 꼭 와야 하는 곳이 아닐까 싶었다.
#. 주변 볼거리
먼 길 달려 갔는데 카터의 고향 마을만 보고 오기엔 조금 아쉽다 싶으면 오가는 길에 한 두 곳 더 살피고 오는 것도 좋다. 우선 플레인스가 속한 섬터카운티(Sumter County)다. 1831년에 설립된 섬터카운티는 영국과의 독립전쟁 때 활약한 장군이었던 토머스 섬터(1734~1832) 이름에서 유래했다. 카운티 행정수도는 아메리커스(Americus)다.
섬터카운티 행정수도 아메리커스 시청 건물
플레인스 동쪽으로 10마일 거리에 있는 아메리커스는 2020년 기준으로 1만6000명 정도가 사는 작은 도시다. 쇠락하는 남부 도시 치고는 드물게 2개의 대학이 있어 외부 방문자들도 꽤 있는 편이다. 1906년에 설립된 조지아 사우스웨스턴주립대와, 1차 대전 시기 미국과 영국 조종사들의 비행 훈련기지(Souther Field)를 기반으로 세워진 사우스조지아 테크니컬 칼리지가 그것이다.
1925년 10월, 33시간에 걸친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으로 세계적 영웅이 되었던 린드버그가 훈련받았던 곳이 아메리커스였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아메리커스 지역 공항(Jimmy Carter Regional Airport)입구에 린드버그 동상이 세워져 있다. ▶주소: 223 Airport Rd. Americus, GA 31709.
최초의 대서양 단독 횡단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 동상. 섬터카운티 아메리커스 지역 공항 입구에 있다
섬터카운티 북쪽 끝에 있는 앤더스빌 국립 전쟁 포로 박물관(National Prisoner of War Museum)도 들러볼 만하다. 이곳은 남북전쟁 당시 북군 포로들을 수용했던 남부연합 최대의 포로수용소였다. 전쟁 말기 14개월 동안 운영되었는데 4만5000여명의 북군 포로들이 이곳에 수용됐다고 한다.
특히 이곳은 유례없이 혹독하게 포로를 대접한 것으로 악명 높았다. 지금은 연방정부 관할의 국립사적지(Andersonville National Historic Site)로 지정돼 있으며 그동안 미국이 치렀던 수많은 전쟁에서 고통 받았던 미국인 전쟁 포로(POW) 모두를 위한 추모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애틀랜타에서 I-75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 가다 포사이스(Forsyth) 즈음에서 빠져나와 지방도로를 이용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주소: 760 Pow Rd. Andersonville, GA 31711
연방사적지로 지정된 앤더스빌 포로수용소 전쟁 포로 박물관
내려 갈 때 지방도로를 이용했다면 돌아올 땐 코딜(Codele) 인근 I-75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좋다. 고속도로 진입하기 전에 조지아 베테런스 메모리얼 주립공원(Georgia Veterans Memorial state Park)을 잠시 들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아 베테런스 메모리얼 주립공원. 남서부 최대 호수를 낀 주립공원이다.
아메리커스에서 20분 쯤 거리에 있는 이곳은 이 일대 최대 호수인 블랙시어 호수(Lake Blackshear)를 끼고 있어 물놀이, 낚시, 캠핑, 하이킹 등 다양한 놀이를 즐길 수 있다.
조지아 베테런스 메모리얼 주립공원
방문자센터에는 간단한 전쟁 박물관이 있다. 야외엔 2차 대전 때와 베트남전 당시 실제 사용됐던 전투기와 B-29 폭격기, 헬리콥터가 전시돼 있고 각종 탱크와 전차, 야포도 볼 수 있다. 입장료 5달러. ▶주소: 2459 US-280W, Cordele, GA 31015)
조지아 베테런스 메모리얼 주립공원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