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창한 봄 날, 한 신사가 뉴욕의 공원에서 노숙자를 만났다. 그 노숙자는 “나는 맹인입니다”(I am blind)라고 적힌 푯말을 목에 걸고 구걸하고 있었다. 하지만 행인들은 그냥 지나칠 뿐 적선을 하지 않았다. 신사는 노숙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노숙자의 목에 걸린 글을 고쳐 적었다. 그 다음부터는 갑자기 적선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 신사는 푯말을 이렇게 바꿨던 것이다. “바야흐로 봄은 오고 있으나 나는 볼 수가 없습니다”(Spring is coming soon. But I can not see it). 그 신사는 바로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볼톤이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새롭게 적힌 문장에는 창의성과 감동이 담겼다. 심금을 울리는 한 줄의 문장이 행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시가 참 좋아졌다. 짧기도 하거니와 시를 읽을 때마다 암호를 푸는 것 같아서 좋았다. 아무리 다시 읽어도 도무지 하나의 글처럼 느껴지지 않는 시가 참 좋았다.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의 민중시인이자 저항시인이다. 그는 69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정치가이자 시인으로서 ‘잉크보다 피에 가까운 시인’, ‘모든 언어를 통틀어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이란 찬사를 들었다. 197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파블로 네루다가 망명해서 이탈리아의 어느 섬에 머물렀을 때, 세계 각지에서 보내오는 편지를 그에게 전해주는 한 순박한 우편배달부와 나눈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우편배달부는 그 시인과의 만남을 통해 인생에 눈을 떠간다.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자막이 올라갈 때, “내가 그 나이였을 때/시가 날 찾아왔다”는 시 한 편이 소개된다.
‘시가 날 찾아왔다’는 문장이 참 매혹적이다. 은유의 문장은 이렇게 ’문득 길모퉁이에서 밤의 한 자락에서, 불길 속에서, 다시 찾아오는 외로움 속에서‘ 찾아오나 보다. 영화 의 주인공 마리오는 백수다. 하루는 영화를 보러갔는데 그 곳에서 파블로 네루다라는 칠레의 시인이 마리오의 시골 동네로 망명을 온다는 소식을 접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영화관 옆 건물에는 우편배달부 구인 공고가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하라는 아버지의 충고가 떠올라 그는 우체국을 찾아간다. 공교롭게도 그 우편배달부의 일은 파블로 네루다에게 오는 편지만을 배달하는 일이었다. 마리오는 시인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전부 여성이라는 사실에 시를 쓰면 여성에게 인기가 많아질까 하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시인을 귀찮게하기 시작한다. 마침 마을의 주점에 마리오의 혼을 빼놓아버린 여성이 나타났다. 연애시의 대가에게 마리오는 묻는다. 어떻게 시인이 되었냐고. 그리고 대시인은 답한다.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를 감상해보게.”
시를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해변을 걸으라고 한다. 마리오는 도통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 하겠다. 그래도 일단 해변을 걸어본다. 그리고 시인의 시를 읽으며 되뇐다. 하루는 편지를 배달하고 시인 앞에서 그의 시를 인용하며 멋진 말을 해본다. 시인은 자신 앞에서 ’메타포(은유)‘를 사용하지 말라며 충고한다. 본인이 메타포의 대가이니 자신 앞에서 젠체말라는 것일까. 의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마리오는 메타포가 뭔지도 모른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의 뜻을 시인에게 묻고 설명을 듣는다.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것 같은 말인 은유. 마리오는 조금 더 해변을 걷기로 한다. 하루는 해변에서 수영을 하려는 시인이 순간 떠오른 심상을 시로써 마리오에게 들려준다. 그 시를 들은 마리오는 대시인의 시가 이상하다고 답한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한 시인에게 마리오가 말을 이어간다. “단어가 왔다갔다 하는 것 같아요. 바다 위의 배가 단어들로 이리저리 튕기는 느낌이에요.” “방금 자네가 한 말이 뭔지 아나? 그게 은유야.” 그렇게 마리오는 시인이 되었다.
시가 태어난 때와 자리는 아무도 모른다. 시는 그렇게 태어난다. 시는 아마 인류 역사가 시작 되었을 때부터 태어나지 않았을까. 불이 발견되기 전 즉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절에 아마 당시의 인류는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을 때 “와, 봄이다!”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 외침이 바로 ‘시’라고 한다. 그렇게, 말은 평범하지만 체험은 극적인 것이 시가 된다. 그래서 누구나 시를 느끼고 말하고 산다. 사람의 마음에는 누구나 다 시가 들어있다. 그것은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으며, 시는 자기 체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잊을 수 없는 어떤 기억일 수도, 소소한 일상의 체험일 수도, 기대와 반전의 웃음일 수도 있다. 시는 지금도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우리의 마음을 노크하고 있다. 시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비록 시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어디서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마음이 살짝 움직이면서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얹은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말이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시심(詩心)이 되어 시의 씨앗을 길러간다. 한편 ‘시가 날 찾아왔다’는 구절은 ‘마음이 날 찾아왔다’라고도 들린다. 두 사람 사이에서 주고받은 순박한 마음이 내게도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여준 소박한 믿음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선 찾아보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물질 문명이 너무 번성하여 인심이 이기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네루다는, 갑자기 세상 만물이 달리 보이면 그것이 시라고 했다. 그는 하찮은 양말 한 켤레에서 일흔한 줄이나 되는 시를 풀어냈다. 토마토 옷 양파 수탉 다리미 우표책에도 시를 바쳤다. 그의 시에는 일상의 아름다움과 놀라움이 가득하다. 그렇듯 시란, 모든 것에 숨결과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 일이다. 늘 그곳에 있던 것이 어느 날 새롭게 보이는 일이다. 그렇게 눈과 귀를 밝혀주고, 가슴과 머리를 씻어준다. 때로 사람이 밉고, 사는 게 힘들 때 따스한 위로로 다가온다. 시가 그립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딱 스물네자로 이뤄진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국민 애송시다. 사람들이 모두 이런 시심을 가슴에 아로새긴다면 삭막한 세상이 한결 밝고 따뜻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