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한다. 친구–.때론 가족보다 더 가깝고 소중하며 모든 걸 털어놓고 이야기하며 충고를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관계다. 그러니 사귀는 벗을 보면 그를 알 수 있다는 말이 헛된 말이 결코 아니다. 공자는 “선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향기를 맡지 못하니 그 향기에 동화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만큼 친구와 그 사이의 정이 우리 인생살이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리라.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의 대신이었던 관중과 포숙아가 보여준 뜨겁고 깊은 우정에서 비롯한 관포지교(管鮑之交)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제나라의 절친 관중과 포숙아는 군주의 아들 규와 소백의 신하였다. 군주가 죽자 두 아들이 왕좌를 놓고 다퉜고 관중과 포숙아도 적이 됐다. 관중은 규를 왕좌에 앉히려고 소백을 죽이려다 실패했고, 소백이 왕이 됐다. 소백은 관중을 죽이려 했는데, 포숙아가 말리며 관중을 신하로 쓰라고 했다.“관중의 재능은 신보다 몇 곱절 낫습니다. 제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으로도 충분합니다만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관중을 기용하셔야 하옵니다.”환공은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나랏일을 맡겼다. 재상에 오른 관중은 재능을 발휘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시대의 패자로 올라서도록 도왔다.
후에 관중은 포숙아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젊고 가난했을 때 포숙아와 함께 장사를 하면서 언제나 그보다 더 많은 이득을 취했다. 그러나 포숙아는 나에게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몇번씩 벼슬에 나갔으나 그때마다 쫓겨났다. 그래도 그는 나를 무능하다고 흉 보지 않았다. 내게 아직 운이 안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싸움터에서 도망쳐 온 적도 있으나 그는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다.”
깊은 우정을 담고 있는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게 바로 ‘지음지교(知音之交)’다. 자신을 가장 잘 알아주는 친구를 뜻하는 지기지우(知己之友) 즉 지기의 대명사이자 우정을 표현한 단어 중 최고로 꼽는 말이다. 보통은 ‘지음(知音)’이라는 말로 많이 쓰고 있다. 춘추시대 진나라 대부인 유백아는 원래 초나라 사람으로 진나라에 출사한 거문고 연주의 대가다. 어느날 고국인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다가 모처럼 고향을 찾았다. 마침 보름달이 밝아 흥이 난 백아는 소나무 밑에서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그때 나무 뒤에서 쉬고있던 나뭇꾼 종자기는 연주가 끝났는데도 눈을 지긋이 감고 삼매경에 빠져있다. 이렇게 시작한 첫 만남에서 몇 곡 더 들려주는 대로 백아의 작곡 의도를 정확히 짚어내는 종자기였다.
통성명을 한 후 두 사람은 나이를 뛰어넘는 친구(忘年之交)가 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후 헤어진 두 사람. 이듬해 백아는 약속대로 종자기를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무덤 앞에서 마지막 연주를 한 백아는 거문고 줄을 모두 끊어 버렸다. 자신의 음악세계를 알아주는 이(知音)가 이미 없으니 내 소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비록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자신의 예술정신을 오롯이 알아준 친구를 위해, 신분과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백아는 그의 모든 것을 버렸다. 이밖에 지초와 난초의 향기같은 아름다운 우정을 나타낸 지란지교(芝蘭之交)가 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 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은 친구.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은 친구가….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은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친구와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다. 한줄 한줄이 주옥같은 글이다. 나도 이런 친구를 갖고 싶다.
만 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맡기며/맘 놓고 갈 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운 때에도/‘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 서로 사양하며/‘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 위해/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시의 지은이는 함석헌 선생이다. 평생을 올곧고 바르게 부끄럼 없이 살아온 선생도 한 동안은 세상의 일과 오해에 얽혀 곤란한 처지에 빠진 시절이 있었다 한다. 그 때 선생은 스스로 집안에 관을 하나 들여놓고 그 속에 들어가 자신이 죽은 사람이거니 생각하고 심각하게 자성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 때 이런 시를 생각했지 싶다. 어쨌든 보통의 시가 아니다. 바늘로 가슴을 찌르듯 충격을 주는 시이다.
나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많은 사람들이 ‘친구’라는 말을 즐겨하지만, 친구가 될 줄은 모른다. 나도 그렇다. 친구 사귀기가 참 조심스럽다. 흔히“친구는 한 사람이면 족하고, 두 사람이면 많고, 세 사람이면 불가능하다”고 한다. 참된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지, 참된 친구를 갖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를 동시에 깨우쳐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친구들과 함께 좋은 생각을 나누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함께 즐길 수 있으면 그것은 축복이다. 지난 시절을 감사할 수 있고 남은 날들에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행복한 노년이 어디 있을까. 젊은 날의 우정이 아름답다면 황혼까지 이어져 간 우정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