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어둠을 밀어내듯이 푸르게 물들어가고, 길 건너 가로등이 밤새 어둠 속에서 빛을 뿌리느라 힘겨웠는지 깜박깜박 졸고 있었다. 캠핑의 일등 공신인 미니밴 안에 준비된 짐들을 옮기고 특별히 챙긴 김치 한 통 그리고 몇 가지 간식거리들은 냉장고 안을 가득 채웠다. 여행으로 들뜬 마음이 자동차 엔진 위에서 부릉거리고 시원한 새벽 바람이 풀 내음과 함께 가족들의 설렘을 더해주었다.
앨라배마를 뒤로 한 채, 우리는 콜로라도 록키 마운틴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과 함께 하얀 구름떼가 푸른 하늘 위를 가득 메우고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새의 웅장함에 자연의 위대함을 또 한 번 느꼈다.
차들로 가득 찬 록키 마운틴 내셔널 파크 주차장에 주차를 마친 우리는 각자의 배낭에 물과 비상 식품과 비옷을 담고 패딩 잠바를 입은 후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우린 베어 레이크를 지나 하야하 호수로 향했다. 숨을 헐떡이며 계속 좁고 가파른 길을 오르는 중 간간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계속 올라갔다.
고산지역이라 그런지 숨이 차고 머리가 아팠다. 누군가의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스쳐 지나간다. 내려오는 등산객들 신발에 아이징을 착용한 것으로 보아 정상 근처까지 온 모양이다. 위험한 곳이 두 군데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조언과 응원을 남기고 가는 친절함도 이곳에서는 절로 배어 나오는 인정인 듯싶었다.
30cm 정도의 눈 쌓인 좁은 길과 낭떠러지가 내 앞에서 올라가려는 의지를 망설이게 하였다. 등산화만 신고 그곳을 지나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만한 배짱이 없는 나는 그냥 돌아가자고 신랑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정상을 못 보고 되돌아가는 것이 아쉬웠는지 애써 나의 눈짓을 외면하고 눈 위에 깊은 발자국을 내어주었다. 우린 그 위를 밟고 조심조심 한발 한발 옮겨갔다. 그동안 쌓여있는 눈 위의 깊은 발자국들은 그 순간순간 안전을 염원하는 기도의 흔적이었음을…
베어 레이크나 에메랄드 레이크에 비해 힘든 트레일 코스였지만 울퉁불퉁한 바위로 호수 전체를 덮고 청록색으로 빛나는 호수의 수려함은 헐떡이는 숨 가쁨도 지끈거리는 고산증도 후들거리는 다리의 떨림 까지도 녹이는 것 같았다. 또한 그냥 돌아가자는 내 의견을 무시하고 오길 잘했다는 듯이 의기양양한 신랑의 미소도 그 순간은 용서가 되었다.
숨을 돌리고 돌아오는 길은 좀 더 익숙할 거라 생각했는데 내려가는 길이 더 무섭고 위험했다. 난코스라 불리는 장소에 이르렀다. 쌓여있는 눈 위를 칠순 후반쯤 돼 보이는 노부부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조심스럽게 한발짝씩,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발 걸음을 옮기는 아슬 아슬한 모습, 실수라도 해서 미끄러지면 손쓸 겨를 없이 떨어지는 절벽이었다. 그 광경을 보는 것만 해도 손에 땀이 고였다.
할머니의 다부진 모습과 달리 몸이 정상이 아닌 할아버지는 인생의 마지막 도전이라도 되듯 흔들리는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가며 좁은 눈길 위에 포기하지 않는 강한 의지의 메시지를 새기는 듯하였다. 잡아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상황….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부부의 안전을 위한 기도가 가슴 깊은 곳에서 움틀 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도 그 순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던 여행객들의 마음이 같았을 것이다. 자신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긴 시간을 기다려준 것에 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고맙다는 말과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는 말을 건네며 먼저 가라고 길을 비켜 주었다. 자연 앞에서의 인간의 작은 존재감, 그리고 그 속에서도 피부색과 언어가 달라도 서로를 배려하고 느끼고 양보하며 살아가는 따뜻한 인간미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한참을 내려왔을까. 후들후들 거리는 발걸음은 노부부가 나머지 위험한 구간을 무사히 지나왔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들며 속력을 내지를 못했다. 주차장에 다다랐을 때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노부부가 안전하게 내려오길 바라는 마음이 붉은 노을이 되어 가슴속을 물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