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다가 문득 닥터 Y 생각이 나 전화를 걸었다. 환자인 부인을 집에서 돌보며 간병인을 고용하는 분, 요즈음 그와 부인의 건강은 어떠신가 궁금했다.
“아 김 교수? 오늘은 안 바빠 요?” “안 바빠 요. 사모님은 좀 어떠세요?” “그저 그래요. 안 바쁘면 와요. 마침 우리 집에 좋은 와인도 한 병 사다 놓았어요. 11시 반까지 와요 기다릴 께.” 그를 불러내 밖에서 점심이나 같이 할 까 했는데, 그는 집을 떠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아귀-포를 사 가지고 그의 집을 찾아 갔다. 와인을 한 잔 할 때 그와 나는 아귀-포 안주를 좋아한다. 그의 집 뒷마당 가장자리는 울창한 숲으로 이어져서 아늑한데, 거기 화단에 그가 과목과 꽃들을 심고, 작은 연못을 만들어 금붕어를 기르며 작은 물레방아도 만들어 놓았다.
마당 가운데 화덕을 만들어 화덕에 장작 불을 피워 놓고, 그가 지금은 쓸모 없는 책들과 문서들을 태운다고 하기에 나도 쓸데없는 책들을 한 상자 가져가서 태우며, 모닥불 곁에 앉아 와인 잔을 들고 살아온 이야기도 나눈 적도 있고, 화덕에 옥수수와 고구마를 구어 먹기도 했다.
닥터 Y의 집을 찾아 가 초인종을 누르니 문을 연 사람은 못 보던 한국 여인이다. 혹시 이집의 며느리세요하고 물어보니, 간병인이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문 앞 쪽에 닥터Y의 부인이 운동 하는 자전거에 앉아있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뒤로 묶었고, 얼굴은 화장기 없이 맑았다. 그녀의 얼굴 가까이 내 얼굴을 대고 인사를 했다.
“부인도 잘 있어요?” “예 잘 있어요.” 그렇게 대답을 했지만, 정말 이분이 나와 아내를 기억하실 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치매에 파킨슨 병을 앓고 계시는 분, 응급 실에도 갔었든 분이 몇 번 본 나와 아내를 기억하는지 의심이 들었다.
닥터 Y는 지하실에서 손수 만든 작은 테이블을 들고 이층 거실로 올라왔다. 그는 손수 만든 테이블을 아내의 병실로 가져가서, 침대 머리 옆에 벽에 놓으니, 뒷벽과 옆 벽에 꼭 맞는다. 그 테이블 앞에 환자가 쓰는 이동용 변기가 있고, 변기 옆 벽에도 길다란 손잡이를 만들어 환자가 변기를 쓰려고 할 때 침대와 벽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도록 만들어 놓았다.
닥터Y가 다른 일로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간병인은 환자의 음식을 만들고 있는 사이, 환자에게 가보니, 운동 자전거에서 옆에 있는 휠체어로 옮기고 싶어했다. 망설이다가 환자의 어깨와 팔을 잡고 휠체어로 옮겨 앉게 도왔다.
안전하게 옮긴 후 휠체어를 밀어 드렸다. 안방, 부엌, 침실 앞, 객실 앞, 그리고 서재가 있는 구석 방에 가니, 구석 방에서는 뒷마당의 정원이 창유리로 훤히 내려다 보였다.
‘코스모스.” 부인이 말 하는 눈길 쪽을 보았다. 화단 끝자락에 코스모스 꽃 송이들이 하늘하늘 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와, 코스모스가 아주 예쁘게 피었네요!” 나도 오랜 만에 보는 반가운 꽃이었다. 코스모스의 분홍빛 꽃들, 하얀 꽃들은 가느다란 줄기 끝에 달려 가을 바람에 춤추었다.
“사모님이 젊어서는 피아노도 치셨지요?” “예, 쳤지요.”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노래 아시죠?”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부인이 낮은 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나도 따라 불렀다. 하도 오랜 만이라 나는 가사가 생각 나지 않아 모르는 부분을 허밍 멜로디로 흥얼거렸다. 부인의 낮은 목소리의 노래에 박자를 맞추었다. 속으로 놀라웠다. 치매를 앓으시는 80대 할머니가 노래가사와 멜로디를 기억하다니 놀라웠다.
“기다리는 마음같이 초조하여라/단풍 같은 마음으로 노래합니다/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찬바람 미워서 꽃 속에 숨었나/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노래가 끝나고 잠깐 우리 둘은 창유리 밖의 분홍빛 코스모스 꽃을 바라보았다. 추억 속 코스모스 꽃 송이들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 “사모님 놀라워요! 나는 가사를 다 잊었는데, 사모님은 기억하시네요!” “나도.. 다는 기억 못해요.” “그래도 노래를 다 하시네요!”
간병인 아주머니가 와서 사모님 휠체어를 밀고 식탁으로 가고 나는 지하실로 내려가 닥터 Y와 와인잔을들었다. 나는 요즘 피클볼을 치느라고 골프는 못 치는데, 닥터 윤도 피클 볼을 쳐보는 게 어떠냐 고 물었다. “신문사 그분 93세인 그분은 아직도 걸어서 골프 쳐요?”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나도 골프나 치겠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사모님이 창가에서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노래하던 모습이 아름답게 생각나고, 닥터Y가 병든 부인이 천사가 되어 간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