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망하는 자는 기다리며 모색한다. 더 나은 날을 위해. 기다림이란 삶에 있어서 늘 희망으로 남아있는 영역이다. 특히 오늘 아픔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다림이란 참으로 행복의 영역이기도 하다.
일본의 대표적 무장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전국시대의 3걸’로 불린다. 이 셋의 리더십은 서로 달랐다. 단시를 읊을 때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야 한다”고, 읊었고,, 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해야 한다”고, 이에야스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읊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생은 참고 기다리는 ‘인내’ 그 자체였다. 그는 6세의 어린 나이에 인질생활을 시작했다. 일본 통일의 문을 연 오다 노부나가와 사실상 패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묵묵히 힘을 길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도쿠가와는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고 살아남기 위해 장남도 할복시킨 비정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노부나가의 편지를 읽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이 떨렸다. “ 반역을 꿈꾸는 그대의 아내와 장남 노부야스를 죽이시오.” 이에야스의 아내 츠키야마 부인은 스루가의 영주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조카딸이다. 이마가와 가문은 이미 노부나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 멸망했다. 아내 츠키야마 부인이 친정 가문을 초토화시킨 남편과 노부나가에게 원한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장남 노부야스는 노부나가의 사위기도 했다. 아버지와 장인을 상대로 반역을 꾀했을 리 없다. 도쿠가와는 아들을 잘 알았다. 전쟁터에서 누구보다 혼신을 다해 싸우는 아이였다. 노부나가 역시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이 편지 내용은 구실일 뿐이다. 노부나가의 뜻은 분명했다. 세력이 커진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다.
갈등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아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노부나가와 결별해야 한다. 그것은 그와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이제 도쿠가와의 세력도 결코 작지는 않다. 한판 승부를 해 볼 수도 있긴 하다. 마지못해 노부나가 앞에 무릎 꿇은 많은 영주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손만 뻗으면 그들은 당장 달려올 것이다. 자신만 해도 100만석 영지의 주인이자 4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 함께 할 영주들의 군사를 모으면 간단히 10만을 넘길 수 있다. 도쿠가와는 침식을 거두고 3일을 괴로워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도쿠가와는 끝내 비정한 아버지가 되기로 결심한다. 오다 노부나가를 거스르기엔 아직 때가 아니었다. 그 날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할복을 명했다. 그의 마지막 음성은 칼날처럼 차가웠다. 영문을 모르는 장남은 돌아앉은 아버지를 눈물로 부르면서 자기 배를 갈랐다. 불행한 장남은 그렇게 죽었다. 아내 역시 독배를 마셔야 했다.
도쿠가와는 이토록 훗날의 때를 기다리기 위해 장남과 아내까지 희생시켰다. 지독한 괴로움 속에 참고 또 참아야 하는 끈질긴 인내의 삶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죽고 죽이던 전국시대 한복판에서 살아남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운이 좋았다. 당시로는 드물게 75세까지 장수할 정도로 매우 건강했다. 충성스러운 신하를 많이 뒀고, 후손들도 많았다. 게다가 전국시대를 살아남을 만큼 무장으로서 재능도 물려받았다. 무예가 뛰어났고, 강한 용기의 소유자였다. 미래를 꿰뚫어보는 혜안, 세상를 내다보는 명민한 판단력, 민심을 헤아리는 통찰력, 신하들을 잘 이끄는 통솔력, 전국 다이묘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는 포용력과 지도력을 갖췄다.
도쿠가와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이마가와는 자기 조카딸과 혼인시킨다. 도쿠가와 가문의 유일한 계승자를 자기 가문에 동화시켜 마침내 미카와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다분한 혼인이었다. 물론 도쿠가와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혼인을 반대할 힘도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이마가와는 일찍부터 전쟁의 최선봉에 도쿠가와를 앞세웠다. 전쟁이 잦은 시대였던 그 시절, 도쿠가와는 걸핏하면 전쟁터에 나가 싸워야했다. 그래도 그는 불평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항상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고 전략을 연구했다.
전쟁을 언제나 승리로 이끄는 그를 이마가와 사람들 누구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어린 나이 때부터 이미 세상을 알았다. 자기 목숨을 담보로 세상을 배운 것이다. 참고 또 참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 처절한 환경에서 그는 정신과 몸을 단련시켰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의 어린 시절 불행은 인생의 축복이 되었다.
1598년 8월 16일, 6세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5대로에게 맡기고 히데요시는 눈을 감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의 달인이었다. 그는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것도 아니다. 시대가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남이 견디지 못할 일을 참고,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성취시킨 인내, 고난과 위기 속에서 배양된 지혜, 판단력·행동력·조직력이 그를 천하인(天下人)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중앙 정권에 군림하게 된 이에야스는 1603년 2월, 일왕으로부터 쇼군(장군: 征夷大將軍)의 칙명을 받아 군권과 정권을 동시에 장악하고 자신의 영지였던 에도(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개설했다.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그가 남긴 유훈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무슨 일이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걸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로움이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면 안 된다. 미치지 못하는 것이 지나친 것보다 낫다.” 이것은 후세의 위작(僞作)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이보다 더 그의 처세법을 정확히 표현한 것도 없다. 여기 언급된 사항 중에 단 하나도 제대로 지키기 어렵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모두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지킨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