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가 풍족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졸업식이나 운동회 그리고 생일날 등 특별한 날이 되어야만 먹을 수 있었던 짜장면. 정신없이 먹다 보면 입 주변에 짜장이 묻어도 그저 행복했던 그 시절 추억이 가끔 떠올려지곤 한다.
짜장면 한 그릇 배달시켜주시고/우물가에 앉아 빨래하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고 싶을 때/밥은 안 먹는다고/짜장면을 사달라고 떼를 쓰던 내 손을 꼭 잡고 가/짜장면을 사주시던 아버지의 다정한 눈빛이 보고 싶을 때/신나게 짜장면을 먹고 아버지보다 먼저 뛰어가/골목 모퉁이를 돌아가던 내 작은 그림자가 그리워질 때/내가 먹던 짜장면을 빼앗아 먹고 좋아하던/가난했던 친구의 눈 웃음이 문득 그리워질 때/젊음을 바칠 사랑도 조국도 없다고/벗들이 조국과 사랑을 버리고 다 떠나가 버렸을 때/희망 없이도 열심히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하여/인천행 전철을 타고/차이나타운에 가서 곱빼기로 짜장면을 사 먹으면/나는 다시 푸른 소년이 되어 자란다. /짜장면을 배달하던 소년의 철가방에 내리던 봄비가 되어/다시 짜장면처럼 맛있는 풀잎이 되어 자란다.
정호승 시인의 ‘짜장면’이다. 짜장면 한 그릇으로 마음이 넉넉해지는 유년기의 추억은 짜장면 맛처럼 간간하다. 떼를 쓰면 나무람 대신 짜장면을 사주셨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이 그리워질 때, 짜장면을 나눠 먹었던 친구의 눈웃음이 그리워질 때 그 추억과 등가를 이루는 달착지근한 맛이다.
짜장면은 우선 맛있다. 짜장면과 함께 중국 요리 하나 곁들여 먹는 것이 최고의 호사 가운데 하나였다. 이제는 워낙 먹을 것이 많아져서 짜장면을 찾지 않지만 바로 이와 같은 추억 때문에 아직도 외식이란 이야기가 나오면 자동으로 짜장면이 떠오른다..
짜장면은 아련한 추억이다. 내가 짜장면을 처음 먹어본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그때 우리 반에 힘이 센 주먹대장이 하나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져서 보기만 해도 무서웠다. 그의 앞에 서면 모두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벌벌 떨었다. 멋 모르고 대들었던 한 녀석이 그의 주먹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고 다시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아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유 없이 아이들을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항상 말이 없고 의젓했다. 교실 맨 뒷줄 자리에 버티고 앉아 있기만 해도 교실 분위기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사고를 쳐서 유급하는 바람에 동생뻘 되는 우리들과 한 학급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가 보기에는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은 깜도 안되는 꼬마들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그를 보면 슬슬 피했다. 나도 조심했다. 더구나 나는 새로 전학 와서 친구도 없고 모든 게 생소하고 서먹서먹했다.
어느 날 내 곁을 지나가던 그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 이따가 좀 봐!” 가슴이 덜컥했다. 왜 보자고 하는 걸까. 돈을 뜯으려는 걸까. 수업이 끝난 후 그는 내 앞으로와서 조용히 말했다. “따라와!” 나는 순한 양처럼 따라갔다. 어디로 가려는 걸까.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들은 학교 뒷마당으로 끌고 가 팬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으슥한 학교 뒷마당이 아니라 학교 교문 앞 중국반점이었다. 중국 화교인 듯한 수더분하게 생긴 중년 여인이 뛰어나오며 반갑게 맞았다. 우리는 아주머니가 안내하는 대로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 먹을래?”감히 말을 못하고 쭈볏쭈볏하니까 답답하다는 듯 아주머니를 향해 소리쳤다. “아주머니 여기 짜장면 두 그릇 줘요.”그는 거침이 없었다.
잠시 후 우리 식탁에는 두 그릇의 짜장면이 놓여졌다. 내가 계속 눈치를 보며 쭈빗쭈빗하니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임마, 먹어. 이거 아주 맛있는 거야.” 나는 따라 먹기 시작했다. 달짝지근한 맛이 기가 막혔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슬슬 걱정이 됐다. 나더러 음식 값을 내라고 하면 어떡하나. 나는 수중에 한 푼도 없는데….그런데 그는 손으로 입을 닦으며 카운터로 걸어나가더니 음식 값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위대해 (?)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돈을 냈다.
그때 그가 음식 값으로 지불한 돈은 정당하게 취득한 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그는 왜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었을까. 아무 힘도 없고, 털어야 나올 것도 없는 나를 불러내 짜장면을 사준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새로 전학 와서 어릿어릿 하는 내가 측은해 보였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위세를 한번 과시해본 것일까?
지금도 짜장면을 먹을 때마다 무뚝뚝한 그 형이 떠오른다. 다시 만난다면 내 가 한턱 쏠 텐데… 만나면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 그때 참 맛있게 먹었노라고.
짜장면은 맛으로 먹는 다기보다 추억이나 감성으로 먹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일까. 후루룩 쩝쩝, 후루룩 쩝쩝 하며 오로지 맛으로만 후딱 먹어치웠던 ‘짜장면’이 생각난다. 흡입 한 번에 미끄덩하고 목구멍까지 들이치는 까만 면. 오늘은 짜장면이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