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이라크의 고대 바빌로니아 신전 벽에서 진흙으로 만든 원통형 문서가 발견됐다. 성경에 고레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키루스 2세의 업적을 기록한 원통기록이다. ‘키루스 실린더’로 명명된 이 기록은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용하고, 모든 형태의 노예제와 강제노동을 없애고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원본은 대영박물관에, 그 사본은 유엔본부에 설치되어 있다. 키루스 실린더는 이란인들의 자부심이다.
키루스 대제는 바빌로니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공전의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왕이다. 기원전 541년까지 이란 지역을 거의 정복한 키루스는 바빌로니아 정벌에 나섰다. 바빌로니아 성은 견고했다. 수심도 깊고 폭도 넓은 유프라테스 강이 성을 둘러싸고 흘렀다. 천연의 해자와 함께 높고 견고한 성벽이 수도 바빌론을 둘러싸고 있었다. 키루스는 공격을 거듭했으나 도저히 바빌론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키루스는 날씨를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키루스는 강 물줄기를 바꿨다. 강의 물줄기를 돌리자 바빌로니아에 공급되던 식수가 끊어졌다. 건기로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데다 강으로부터 물이 공급되지 않자 기갈이 바빌론을 휩쓸었다. 무더위와 기갈로 병사와 시민들이 쓰러져 갔다. 항복 외에는 선택이 없었다.
기원전 539년 키루스는 교전 없이 수도 바그다드에 무혈 입성해 비빌로니아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당시 나보니두스와 벨사살 왕의 통치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바빌로니아 백성들은 오히려 키루스를 해방자로 여겨 그를 환영했다. 키루스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은 페르시아 제국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이름이 올라있다.
키루스 대제는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자 조서를 공포하여 바빌로니아에 잡혀온 여러 나라의 백성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것을 허락하고, 유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과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약탈해온 성전의 기물들을 되돌려주도록 지시했다. 또한 키루스 대제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의 비용을 왕실 금고에서 지원했다. 그리고 바빌로니아에 계속 잔류하겠다고 하는 유대인이 있으면 그것도 허락했다.
그는 역사상 보기 드문 현명한 계몽군주였다. 키루스대제는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와는 전혀 다르게 점령한 나라의 포로를 본국으로 붙잡아가지 않고 오히려 자유화 방침을 세워 그 종속민에게 대폭적인 자유를 허락했다. 즉 페르시아의 종교와 제도를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관습과 종교에 관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각국 민족의 문화와 풍속의 보존 발전을 후원했다.
역사상 정복자로서 키루스 대제만큼 존경을 받은 왕은 아마 없을 것이다. 페르시아 백성들은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고, 그리스인은 ‘주(Master)’ 또는 ‘입법자’라 불렀으며, 유대인들은 ‘주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존경을 표시하고 있다.
키루스는 기원전 529년 우즈베키스탄 북쪽에 위치한 아랄해 근처에 있는 마사게테라는 나라를 침공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그의 유언대로 그가 페르시아를 호령하면서 기거했던 파샤르가데에 묻혔다. 페르시아의 첫 번째 수도였던 그 곳에는 현재 키루스 왕의 무덤이 남아있다. 불세출의 영웅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반도를 평정하고, 당시 세계 최대의 강국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멀리 동방의 인도까지 정복한 후 귀환하는 길에 키루스의 무덤을 파괴할 생각으로 그의 무덤을 찾았다.
그런데 묘비에는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나 ,키루스는 한때 세계를 지배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땅이 다른 왕에 의해서 점령될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점령자여, 그대도 언젠가는 누구에겐가 점령을 당할 것이다. 그러니 내 무덤을 건드리지 말아 주시게!” 알렉산드로스는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어의(御衣)를 벗어 키루스 왕의 무덤에 덮어주며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았던 모양이다. 인생과 권력의 무상함을 통찰한 키루스도 훌륭하고, 그의 말을 넓은 가슴으로 받아들인 알렉산드로스도 참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지역을 호령했던 페르시아 제국이 바로 오늘의 이란이다.
1979년 이란 회교혁명 이전까지 미국과 이란은 형제국 같았다. 그러나 이란 회교혁명 이후 두 나라는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친미 왕정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미국에 등을 돌렸을뿐 아니라 이스라엘과도 단교했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합법성도 부정했다. 혁명을 이끈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스라엘을 ‘이슬람의 적’이라 규정했고 미국이라는 “큰 사탄” 옆의 “작은 사탄”이라 지칭했다.
현재 두 나라는 앙숙 관계다. 2011년에는 이란 이스파한의 핵 시설이 폭파됐다. 이스라엘 대외정보기관 모사드가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으로 혁명수비대 장성 하산 모카담 등 17명이 숨졌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역내 영향력 확대를 위한 성전의 명분으로 삼고 있고,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에 폭탄을 던지는 모든 세력은 이란의 군수물자와 자금 지원을 받고 있다. 냉엄한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친구’나 ‘영원한 적’은 없다. 다만 이해관계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