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말 청명한 가을 날 에모리 대학교를 구경 갔다. 은퇴하고 이곳에 온 지 10년 만에 보고 싶던 남부의 명문이자 한국과 관계가 깊은 캠퍼스를 처음으로 구경갔다.
쓰고 있는 책의 자료를 구하려 에모리에 가시는 목사님 차를 타고 갔다. 에모리 대학 캠퍼스를 들어서니, 번잡한 도심 속에서 확 달라진 분위기였다. 키가 큰 나무들로 이루어진 캠퍼스 내의 울창한 숲, 조용한 차량 운행, 정갈한 도로와 한가로이 걷는 학생들로 조용한 캠퍼스는 밖의 시끌벅적한 도시 분위기와 달랐다.
신학대학 복도에서 김 전도사님을 만났다. 박사학위를 공부하는 그는 한국의 감리교 신학대학 재학시절 김 목사님이 총장으로 계실 때 제자라고 했다. 김 전도사가 오늘 에모리 캠퍼스 안내를 해 준다고 했다.
제일 먼저 신학대학으로 들어갔다. 품위 있는 교수들 연구실 중에 하나가 김 목사님의 따님이자 신학대학 김 부교수의 연구실이었다. 김 교수님은 연구발표차 출타 중이어서 만날 수 없었다. 복도에 있는 게시판에 김 교수님이 최근에 쓴 책의 표지 사진이 보였다. 신학 석사과정 디렉터인 김 교수님은 스탠포드를 거쳐 하바드에서 박사학위를 한 엘리트 교수로 연구활동이 활발하다. 게시판에는 새로 오신 한국인 교수도 소개했고, 많은 교수들의 책과 연구논문이 소개되었다.
김 전도사가 인도한 신학대학 도서관에 갔을 때, 윤치호 박사, 애국가를 작사하신 분, 에모리에서 미국 유학 마치고 조선 고종 황제 밑에서 일하며 50년 간 일기를 썼다는 윤치호 박사의 일기가 도서관에 보관되었다는 말이 생각나서, 그 일기를 볼 수 있는가 물었더니, 김 전도사가 찾아주었다.
붉은 커버의 영어로 인쇄된 책인데, ‘윤치호 일기, 국사편찬위원회’라고 한문으로 쓴 글씨가 속 표지에 보였다. 5권의 책, 빌려 갈 수는 없지만 도서관에서는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일기 속에 고종 황제가 무속인의 말을 듣고 가마솥 끓는 물속에 일본 지도를 넣고 끓여 일본이 망하기를 바라던 일기도 있다고 한다.
신학대학 도서관 벽에, 1913년 6월이라는 날짜가 쓰인 조선 교회 그림이 붙어있다. 붉은 벽돌 교회 그림 앞 마당에는 삿갓을 쓴 사람, 양산을 든 여인, 장옷을 뒤집어쓴 여인들이 그려져 있다. ‘조선 서울 종교, 자교, 셕교 예배당 교우 일동’이라는 글씨도 보인다. 그림의 제목이 ‘션별 긔념품’ 이다. 한문 붓글씨도 교회 그림 옆 벽에 전시되었다.
신학대학 도서관 복도에서 두 한국 유학생을 만났다. 그들은 감신대 전 총장님을 알아보고 김 목사님 가까이 와서 공손히 인사한다. 전화를 받은 김 전도사가 전화기를 김 총장님께 전화기를 건네고 전화기 화상 속에 두 청년과 인사말을 나눈다. 도서관 책들을 카트에 싣고 가던 한국 여학생이 총장님을 보고 인사한다. 한국 유학생이 많다고 하니, “한국 유학생들이 이 대학 살려요,” 김목사님이 농담한다.
대학 빌딩들 사이에 넓은 잔디밭엔 큰 참나무들이 웅장하게 서 있고 참나무 밑 그늘에 학생들이 앉거나 누워 이야기도 하고 랩톱으로 의자에 앉아 공부를 한다. 참나무 줄기가 어른 서너 명이 팔을 벌려 안아야 안을 만큼 굵다. 하늘을 덮은 큰 참나무 밑엔 도토리들이 떨어져 구른다. 이 큰 나무는 몇 년이나 늙었을까? 모터 분사기로 잔디밭에 비료를 뿌리는 중년 백인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자기도 모르지만, 한 200년은 묵었을 것이라고 한다. 나무를 위해 특별한 처분을 하느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다만 부러진 가지는 자른다고 한다.
대학교 중앙 도서관 10층에 올라가 높은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여러 단과대학 빌딩들도 보인다. 지금도 계속 팽창한다는 의과대학과 대학병원이 크게 보인다. 빨간 지붕들이 여기 저기 내려다 보인다. 빨간 지붕을 보니 전에 살던 곳에서 빨간 지붕만 보면 머리가 아프다던 분이 생각난다. 고등학교 발레딕토리안 아들이 에모리에 왔다가 퇴학당한 후 빨간 지붕만 보면 머리가 아프다던 엄마의 충격.
우리 일행은 커피 잔을 들고 커피숍 안의 둥근 테이블에 앉았다. 커피숍 안과 밖의 테이블 여기 저기 젊은 학생들이 랩톱 컴퓨터에 코를 박고 열심히 쓰고, 찾느라 삼매경이다. 유리 창밖으로 낙엽들이 날려 떨어진다.
점심 식사 후에 김 목사님과 나는 대학 내의 뮤지엄을 구경했다. 고대 이집트 문화유산들 중에 돌로 만든 관, 죽은 사람을 넣는 관이 내 눈길을 잡았다. 큰 장정도 누울 수 있는 큰 돌 관은 온갖 조각이 겉에 새겨졌다. 누워있는 소의 젖을 빠는 사람의 조각이 보인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소젖을 사람들이 입을 대고 직접 빨아먹은 모양이다.
에모리는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윤치호 유학생 1호, 이홍구 전 국무 총리, 한완상 전 장관을 비롯해서 많은 인재를 교육시켰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제임스 레이니 전 총장은 주한 미국대사이기도 했다. 지금은 우수한 한국인 교수들이 활동하는 대학교이다. 한국과 밀접한 대학의 일부를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단풍 든 숲길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