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년 3월 31일, 동맹군이 파리에 입성했을 때 나폴레옹은 퐁텐블로 성의 자기 방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기다렸다. 한때 독약을 먹고 자살할까 고민했지만 결국 퐁텐블로에서 양위한 후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가족과 헤어져 유배를 떠나던 날 아침, 나폴레옹은 왕비 마리 루이즈와 세 살 난 어린 왕자인 로마왕도 파리와 오스트리아 빈에 각각 강제 격리돼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의 눈물을 흘렸다. 퐁텐블로 성 뜰 앞에서 열린 수비대 고별식에서 나폴레옹은 말했다. “나는 제비꽃이 만발할 때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 도착하자 먼저 프랑스제국의 새 깃발을 게양했다. 궁정 예절과 규율은 나폴레옹이 유럽 대륙을 호령하던 때와 다름없이 엄격히 지켜졌다. 유배라고는 하나 1만 20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섬을 통치할 수 있는 지위가 보장되었으며, 황제의 칭호 또한 인정되었다. 그는 주민들의 식수 부족 민원을 해결해 주는 등의 사소한 일을 하며 소일했다.
나폴레옹의 측근 중 한 사람인 플뢰리 드 샤블롱이 프랑스 국내의 정보를 갖고 엘바섬에 도착했다. 내용인즉 현재 탈레랑에 의해 나폴레옹 암살계획이 진행되고 있으며, 프랑스 병사들과 농민들이 나폴레옹의 귀환을 촉구하는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는 정보였다.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황태후는 아들을 격려하고 나섰다. “가거라 아들아! 가서 네 운명을 개척하거라. 너는 이 섬에서 죽으려고 태어나지는 않았다!”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은 동맹군의 감시를 피해 엘바섬을 탈출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앙티브 근처에 무사히 상륙했다.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서 함께 떠난 몇 명의 폴란드 창기병을 포함해 1천명도 안 되는 극소수 용사들에게 “총 한방 쏘지 않고 파리에 들어갈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는 프랑스 군인과 농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자신의 카리스마에 모든 것을 걸었다. 전 해에 프로방스에서 당한 쓰라린 경험 때문에 나폴레옹은 이 지방을 피해 지금은 ‘나폴레옹 루트’로 알려진 그라그, 디뉴딘, 그로노블을 거치는 산악도로를 택했다. 그는 도핀에서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그로노블 코앞에서 길이 막히고 말았다. 이곳에는 왕당파 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막강한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왕년에 자신의 참모였던 라 베드와예 대령이 연대를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연대는 나폴레옹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선뜻 나서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사령관이 나폴레옹의 병력이 고작 1천 명밖에 안 된다고 하자 병사들은 “우리는? 우리도 함께 계산해야지”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이런 분위기를 전해 들은 나폴레옹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병사들에게 세워총을 시킨 뒤 혼자 앞으로 나섰다. 엘바 섬으로 유배를 떠났던 45세의 패장 나폴레옹은 당당한 기백을 잃지 않았다.“제5 보병연대여! 짐을 알아보겠는가. 병사들이여, 병사들의 황제는 여기 있다. 어서 쏴라!”
이에 병사들이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며 백색 휘장을 떼어내고 황제의 손을 잡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폴레옹은 이제 혼자 남겨진 그들의 지휘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짐은 자네를 잘 알고 있다. 자네를 대령으로 만든 게 누구인가?” “폐하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 자네를 중령으로 만든 게 누구인가?” “폐하입니다.” “그런데도 귀관은 짐과 싸우기를 원하는가!” “전 오직 상부의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순간 병사들은 “황제 만세!”를 외치며 달려와 나폴레옹을 에워쌌다.
나폴레옹이 그로노블 관문에 나타나자 포병대원들은 발포를 거부하고 전 수비대가 그에게 투항했다. 훗날 나폴레옹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로노블에 이르기 전까지 나는 모험가였다. 그러나 이제 그로노블에서 나는 다시 왕이 되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사령관의 군도를 돌려주고 항복한 제5연대를 규합해 그로노블로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폴레옹의 귀환에 프랑스 국민은 환호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나폴레옹의 귀환을 환영하며 토벌군들이 투항했다. 나폴레옹은 3월 20일 파리에 입성했다.
한편 루이 18세는 허둥지둥 파리에서 도망을 쳤고, 전 유럽은 나폴레옹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영국의 웰링턴에게 패하고 말았다. 재집권한 지 꼭 100일만의 일이었다. 이렇게 백일천하는 허망하게 끝나고 나폴레옹은 이번엔 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되었다. 나폴레옹은 영국군의 감시하에 5년 반에 걸친 울분의 나날을 보낸 그는 1820년 5월 5일 새벽 마침내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폴레옹은 본인의 희망대로 고국 프랑스에 묻히지 못하고 세인트 헬레나 섬의 계곡에 묻혔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840년 나폴레옹의 유해는 프랑스로 옮겨져 파리 앵발리드 군사박물관에 안장되었다.
간혹 그런 말을 듣는다. “요즘 시대에는 영웅이 사라졌다. 더 이상 영웅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이다.” 격동의 시대가 끝나고 경제와 사회, 인구 감소 등 여러 국면에서 침체되어가는 세상이다 보니 나오는 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실제로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상이 요구하는 영웅의 표상이 달라졌을 뿐, 영웅은 여전히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요구되는 존재이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는 불행하다. 그러나 영웅을 낳지 못하는 시대는 더욱 불행하다”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