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루스(79)와 피터(80) 자페 부부는 지난 8월 프랑스 여행을 앞두고 웹사이트에서 접속해 체크인을 하고 항공 티켓을 출력했다. 다음날 공항에 가서야 부부는 자신들이 출국편 대신 귀국편을 체크인했다는 걸 깨달았다. 부랴부랴 항공사 카운터에 찾아간 부부에게 직원은 “회사 정책상 현장 체크인을 하고 탑승권을 받으려면 추가 비용을 내야한다”고 안내했다.
루스는 영국 BBC에 “이런 걸 따로 돈을 받는 줄 몰랐다. 결국 티켓 두 장을 받는 데 110파운드(140불)를 냈다”고 전했다. 분개한 부부의 딸이 항공사를 비판하는 글을 SNS에 올렸고, 이 글은 1300만회 이상 조회되면서 기록하며 관심을 모았다. 영국 네티즌들은 “그 돈이면 프린터도 사겠다” 등의 댓글을 남기며 항공사를 비난했다.
지난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심화된 에너지·식량·원자재 등의 가격 상승에 의해 전 세계를 덮친 인플레이션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가운데, 물가 상승에 따른 비용 증가에 직면한 기업들은 슬그머니 무료로 제공하던 상품ㆍ서비스를 다양한 명목으로 유료화로 소비자에게 추가 비용을 청구하고 있다.
케첩·포장 수수료도 유료…”내년 스텔스플레이션 심화”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내년엔 ‘스텔스플레이션(Stealthflation)’이 심화할 전망”이라고 짚었다. 레이더에 좀처럼 탐지되지 않는 스텔스기처럼 각종 지표에 눈에 띄지 않는 방식의 물가 상승이 심해질 것이란 얘기다.
이코노미스트는 호텔ㆍ리조트가 체크인 수수료, 식당은 테이크아웃 고객에게 포장 수수료, 차량 공유 앱이 안전 수수료를 별도 청구하는 행태들을 사례로 꼽았다. 식당ㆍ프렌차이즈 매장에서 공짜로 제공하던 케첩ㆍ소스ㆍ1회용 식기 등에 비용 청구하는 게 대표적이다. 지난해 영국의 한 맥도날드 매장에선 치킨 너겟에 그냥 주던 소스에 돈을 받자 분노한 고객이 관련 영상을 틱톡에 올려 논란이 됐다.
깨알 같은 비용 청구를 예상 못했던 소비자에겐 상당한 부담이 된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올해 2월 은근슬쩍 붙이는 각종 수수료 탓에 시민들이 연간 수십억 달러의 손해를 본다면서 ‘정크 수수료’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에서 주말 여행을 한다고 가정할 때 식사배달 팁(21%), 공항까지 택시 이동에 드는 예약 수수료 등을 별도로 지불하는 수수료가 364.49달러에 이른다고 전했다.
팁에 익숙한 서구권에서도 통상 팁을 받지 않던 영역에 수수료가 붙고 있다. 호주에서는 도어대시 등 음식배달 앱에 자동으로 팁이 추가되고, 인도에서는 택시앱 올라 등에서 “기사에게 팁을 주라”는 요청이 뜬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팁(평균 20%)으로 악명이 높은 미국에서는 보통 팁 요구가 없는 편의점ㆍ웹사이트, 항공기에서도 팁을 요구해 논란이 됐다.
“좌석 온열장치 월18불” 거센 고객 반발로 철회
자동차 업계에선 차량 외에 차량 유지에 필요한 소프트웨어(SW)비용을 따로 청구하는 방식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지난 4월 CNN에 따르면 메르세데스 벤츠는 북미 지역에서 일부 전기 자동차의 가속도를 높이는 옵션에 월 60달러(연간으로는 600달러)를 청구하는 서비스를 발표했다. 소비자 사이에선 이런 기능에 추가 요금을 물리는 건 시기상조라는 반응이 나왔다.
BMW는 일부 차량의 좌석 온열 장치에 요금제를 도입해, 소비자가 월정액(월 18달러)과 3년 정액제(300달러), 무제한(415달러) 등에서 선택하게 하려다 고객 항의가 빗발치자 지난 9월 철회했다.
BMW는 일부 차량 좌석에 온열장치 요금제를 도입하려다가 고객 반발이 거세지자 지난 9월 제도를 도입하지 않기로 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BMW가 좌석 온열 요금제는 포기했지만, 월 20달러짜리 운전 보조 SW와 같은 다른 비용청구는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매체에 따르면 포드도 SW 시장 확대를 염두에 두고 2030년까지 SW 판매목표를 연 200억 달러로 잡고 있다.
‘깨알 비용 청구’엔 빅데이터·인공지능(AI) 기술이 적극 활용된다. 과거엔 성수기·비수기, 평일·주말 정도의 간단한 구분으로 가격을 책정했다면, 요즘은 수요 변동을 실시간 추적해 분(分) 단위로 적용한다. 실제로 우버 등 차량 공유 앱은 실시간 수요가 클 때 더 비싼 요금을 매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앙일보에 “무상 혹은 낮은 가격으로 공급되던 것들이 점점 유상으로 변하고 있다”면서 “특히 인터넷 서비스 의존도가 높아지고 가격 세분화 여지가 커질수록 유료화가 확대할 것”이라고 전했다.
언번들링 전략… “기내화장실도 돈 내랄 판”
서비스ㆍ제품을 쪼개서 파는 ‘언번들링’ 전략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항공업계에선 가족ㆍ지인 등과 옆에 앉기 위한 좌석 선택, 기내 담요에도 돈내라는 곳이 늘고 있다. 유럽 저가항공사 라이언에어에선 기내 화장실 사용시 요금을 따로 받자는 내부 제안도 나왔으나 채택되진 않았다.
외신에 따르면 우버 등 차량공유앱은 이제 실시간으로 피크 수요를 측정해 피크 수요가 발생하면 가격을 올린다. 로이터=연합뉴스
이코노미스트는 “이론적으로는 경제학의 ‘보이지 않는 손’이 승리한 것이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정당한 비용 청구와 폭리 사이 경계가 희박하다는 불평이 나온다”고 꼬집었다. 매체는 “스마트폰카메라 줌 기능도 프리미엄 구독자만 쓰게 될 지경”이라며 “스텔스플레이션이 교묘해질수록 내년에 더 많은 분노를 경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