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마지막 날, 문득 ‘시절인연’ 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떠올랐다. ‘사람이 떠나 간다고 그대여 울지 마세요 , 오고 감 때가 있으니 미련일랑 두지 마세요 … ’ 그 가사가 비 내리는 이 아침에 시리게 가슴에 와 닿았다.
촉촉해진 나무들 사이로 지난 시간 속에 만났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두갈래 머리 학창시절의 동무들, 힘든 육아의 고됨을 함께했던 지인들, 매일 아침 수다로 한때는 식구보다 더 가까웠던 직장 동료들, 같은 취미 활동으로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 ,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에 없는데 그때 그시절 사진처럼 남아있는 추억들이 빗소리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연락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너무도 소중했었던 지나간 인연으로 남겨진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지나간 사람들을 생각할때면 왠지 마음 한켠이 시려온다. 그것은 사람들이 떠나갔다는 생각만은 아닌, 딱 꼬집어 말 할 수 없는 아쉬움같은 향수때문이었다. 사실 그 곳에는 나의 한 조각이 남아 있었다. 세월은 사람만 가져간 것이 아니라 나의 한 부분도 같이 가져 가버린 것이다.
유독 가슴에 남아 있는 친구가 있다. 목이 유난히 길어 두갈래로 길게 땋아 내린 머리가 잘 어울렸던 아이였다. 여린 외모와는 다르게 심지가 굳었던 친구가 나는 좋았다.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버스 뒷자리에 앉아 종점과 종점을 몇번이고 돌아도 끝나지 않았던 많은 이야기를 했다. 철학도 문학도 모든 사회 문제들도 버스라는 사랑방에서 해체되고 재해석되었고 우리는 그렇게 철없던 시절 서로를 키워갔다. 아직도 세모진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던 친구의 진지했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친구가 결혼 후 남편과 함께 광양으로 떠나고 나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소식은 자연 뜸해졌고 서로의 다른 생활로 소원해지게 된 것이다.
어느 날부터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되돌아 오기 시작했다. 사실 난 그즈음 같은 또래의 엄마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 친구와의 연락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뒤늦은 후회로 광양까지 찾아갔지만 그 친구는 이미 이사를 하고 없었다. 이리저리 찾아보려 애썼지만 성과는 없었다. 내 무심함으로 소중했던 친구를 잃었다는 생각에 그 친구는 나의 아픈 아킬레스건이 되어 버렸다. 정말 그 친구와 나와의 인연은 아픈 가시처럼 박혀 있는 시절인연으로 끝인 것일까 그런데 시절인연은 말한다. 사람이 떠나갔다고 울지 말라고… 노래의 뒷부분 가사도 들려오는 듯했다. 좋았던 날 생각하고 고마운 마음 간직하며 바람처럼 물처럼 살아 가라는 …
인연에는 시절인연같은 아쉬운 인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중하게 이어 나가야 하는 현재의 인연들도 많다. 특히 부모님이나 자식, 배우자와 같은 가족과의 인연은 평생 가지고 가야 하는 찐인연이다. 찐인연들이 올 땡스기빙에도 찾아 왔다. 타주에 있는 아들과 딸이 몽고메리로 온 것이다. 하지만 귀여운 손녀가 훌쩍 자란 모습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또 다시 가슴이 시려짐을 느꼈다. 앙증맞고 귀여웠던 아기 시절의 모습이 지나갔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예뻤던 시간들은 아직도 가슴에 생생했다. 시절이 지나갔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아쉬움은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조용했던 집안에 생기가 돌고 음식냄새가 훈훈한 가족애를 풍기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즐거움과 안타까움을 남기고 각자가 제자리로 돌아간 지금 떠난 자리의 아쉬움보다는 굳건하게 떠 받치고 숙성되어 가는 깊은 사랑을 나는 느낀다. 많은 시절인연들의 반복이 찐인연으로 익어 가고 있는 것이다.
살다보면 가벼운 인연들 그리고 진실된 관계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인연들과 만나게 된다. 시절인연이든 찐인연이든 모두 소중한 나의 한조각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때가 되면 놓아야 하는 인연들 임을 이제는 안다. 바람처럼 물처럼 살아가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것은 허무한 덧없음이 아니었다. 응어리지는 걸림돌이 없어야 오롯한 새 인연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덧 2023년도 저물어 간다. 한 시절이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2024년의 새로운 봄도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