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모략의 나라다. 중국인의 사고영역에는 ‘회색지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중시하는 모략은 중국인들의 감성과 사고에 그대로 녹아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도광양회(韜光養晦)’는 자신의 빛을 숨기고 어둠을 키우라는 의미다. 그들은 자신의 속내와 실력을 감추고 한 가지 행동에 열 가지 생각을 담는다.
조광윤(趙匡胤)은 송나라의 창업 군주다. 당시 정세는 많은 왕조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고 지방의 토호들은 나름의 무력으로 인근을 지배하는, 한마디로 난세였다. 이 시기를 바로 ‘5대10국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때 조광윤은 후한에서 나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장군 곽위의 군대에 입대한다. 조광윤의 나이 불과 20세 때이다. 나름의 전공을 세우던 조광윤은 불과 2년 만에 곽위의 눈에 띄어 그의 참모가 된다. 당시 곽위에게는 시영이란 양아들이 있었다. 곽위가 죽자 곽시영이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으니 이가 바로 후주의 세종이다. 후주의 세종은 명군의 자질이 다분한 영웅이었다. 조광윤은 이런 세종의 충실한 신하가 된다. 세종은 어느 날 조광윤에 대한 보고를 받게 된다. “조광윤이 항상 출퇴근 하거나 외출할 때마다 수레를 몇 개씩 갖고 다닙니다. 아마도 많은 재물을 착복하고 뇌물을 받는 것 같습니다.” 세종은 불시에 조광윤을 불러 그 수레에 대해 물어보았다. 조광윤은 “수레에는 책이 들어있습니다”라고 보고했고 이를 확인해보니 조광윤의 말이 사실이었다. 세종이 물었다.“어째서 수레에 책을 가득 싣고 항상 다니는가?”“신은 어릴 때부터 가난하여 공부를 하지 못해 학문이 부족합니다. 계책도 없습니다. 해서 많은 책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이를 바탕으로 지혜를 얻으려 합니다.”
세종은 조광윤을 치하하고 큰 상을 내리면서 그에 대한 신임을 더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묘하게도 영웅의 노력도 큰 작용을 하지만 운 또한 절묘하게 작용한다. 바로 이 시기의 조광윤처럼 말이다. 그야말로 천운이 내린 것이다. 바로 세종 시영이 죽기 바로 전 단행한 인사에서 바로 후주 군대의 핵심인 금군의 대장에 조광윤을 임명한 것이다. 960년, 거란과 북한(北漢)이 손을 잡고 후주를 공격한다는 보고가 조정에 들어온다. 조정에서는 바로 조광윤에게 금군의 반을 거느리고 출전해 거란을 토벌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금군의 나머지 군대는 수도에서 황제를 호위하라는 명을 받는다. 이때 수도에 남은 금군을 지휘하는 장수가 바로 석수신이다. 여기서 바로 주목할 것은 조광윤의 핵심 참모들, 그 중에서도 조보와 석수신이다. 조보는 조광윤이 왕위에 오르자 바로 재상으로 임명되어 조광윤을 보좌해 송나라 초기의 안정적 기틀을 세운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석수신은 조광윤과 의형제를 맺은 군대의 실력자로 조광윤의 충실한 오른팔이었다. 거란을 향해 행군을 하던 조광윤의 군대는 진교에서 멈춘다. 바로 여기서 조보의 계획이 시작된다. 조보는 나이 어린 공제가 황제의 위에 오르자 이미 많은 장군들과 쿠데타 계획을 세운 것이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조광윤은 외적의 위협보다도 내부에 잠재해 있는 위험요소가 더욱 염려스러웠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장군들 가운데 언제 제위를 노리는 자가 나타날지 몰라 고민했다. 어느 날 조광윤은 그의 심복 조보에게 물었다. “제위를 오랫 동안 내 수중에 간직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겠소?” 조보가 대답했다. “전란이 끊이지 않고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군인의 권력이 임금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하의 태평을 유지하는 데는 이렇다 할 양책이 없습니다. 그저 군인의 손으로부터 권력을 박탈하여 그들이 장악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다. 조광윤은 장군 석수신 등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모두가 거나하게 취했을 무렵 조광윤이 말문을 열었다. “황제의 자리도 그리 즐거운 것이 아님을 알았소, 밤에 안심하고 잠을 잘 수도 없으니 말이오.”석수신 등은 조광윤의 뚱딴지 같은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씀의 참뜻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광윤은 줄지어 늘어앉은 장군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황제가 되고 싶지 않은 사나이가 어디 있겠는가.”“폐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의 지위는 하늘이 정하신 것이오니 여기에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석수신 등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자 조광윤은 말을 이었다. “알았소. 여기에 있는 제경들이야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지만, 제경들의 부하 가운데는 더 출세하고 싶어하는 자도 있을 것이오. 만약 제경들의 부하가 왕관을 내밀면 제경들은 어떻게 하겠소. 고개를 가로저을 까닭이 없지 않겠소.”
석수신 등은 조광윤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어리석은 신들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신들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하교해 주옵소서.”조광윤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사람의 일생이란 짧은 것이오. 그저 즐겁게 보내는 것이 제일이지오. 제경들은 군사에서 손을 떼고 토지와 주택을 마련하고 매일 노래와 춤으로 여생을 즐겁게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오.” 다음날 석수신을 비롯한 장군들은 모두 중병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진해서 군사에서 손을 떼고 각각 부대의 통수권을 송태조 조광윤에게 넘겼다. 조광윤은 이를 인수하고 석수신 등을 수도에서 떨어진 지방의 관리로 전보했다.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란 말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연회를 이용하여 장군들의 병권을 간단히 거둬들였다는 뜻이다.
한비자는 군주의 통치술에 대해 “왕은 신하들의 행실을 보고도 보지 못한 듯, 들어도 듣지 못한 듯, 알아도 알지 못한 듯 운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주는 귀가 있어도 감추고 입이 있어도 닫아야 한다는 뜻으로, 왕이 함부로 본심을 드러내면 반드시 우환이 따른다는 경고다. 왕은 웃어도 소리가 없고, 울어도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 왕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투명인간처럼 있어도 보이지 않으면 신하들이 두려움에 떤다. 보이지 않는 칼이 더 무섭다. 내 칼을 감춤으로써 마음을 베는 것, 그쯤 되어야 황제의 법술(法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