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은 어쩌면 삶의 점검시기 같다. 새해 초부터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다 싶지만 막상 달력의 마지막 페이지를 살면서 지난날을 돌아보니 아차 싶다. 잘했던 일들과 잘못했던 일들이 기억속에 또렷해서 여러 일에 부족했던 나의 관심과 노력이 따갑게 의식을 누른다.
연말편지를 쓰려고 노트북을 열면서 벌써 받은 편지를 테이블에 죽 펼쳤다. 해마다 연례행사인 지인들과 교환하는 연말편지는 솔직히 서로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증서 같은 것이다. 살면서 스쳐 지나간 인연들인 원근에 사는 지인들은 거의 대부분 일년내내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평소에 서로 연락없이 지내다가 이맘때가 되면 우리는 어김없이 서로를 기억하고 어김없이 서로를 찾는다.
이 오래된 습관에 지난 20년 동안 정확히 어떤 패턴이 있었다. 예전에 상공회에서 함께 일했던 제레미가 추수감사절이 지나기가 바쁘게 제일 먼저 카드를 보냈다. 그의 밝은 소식은 늘 미소를 짓게 한다. 어번팀 광팬인 그에게 나는 ‘War Eagle!’ 답한다. 그리고 며칠 후 도착하는 두번째 카드는 남쪽 바닷가 가까이 사시는 웨인 신부님이 보낸 카드다. 그런데 5년 전 인가. 웨인 신부님 카드가 제레미의 카드를 제치고 먼저 도착했다. 마치 흥미로운 경주 같아서 남편과 나는 11월 중순이 되면 누가 먼저 우리를 기억하려나 지켜보는 버릇이 됐다.
그런데 올해는 변수가 생겼다. 영국 사돈네와 추수감사절을 함께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찰스 신부님의 카드가 우리를 기다렸다. 늘 1월 초에 연락을 주시는 노신부님이 올해는 모두를 제치고 제일 먼저 축복의 기도를 보내셨다. 그리고 바로 제레미의 소식과 웨인 신부님의 카드가 찾아왔고 이어서 오랫동안 사귀는 지인들의 편지가 하나 둘 도착한다. 그들의 스토리는 한 줄의 인사말 이거나 그들이 살아온 1월부터 12월까지의 소소한 일들을 깨알처럼 1 페이지 혹은3페이지를 꽉 채운 단편소설 같은 논픽션이다. 사람살이 기쁘고 아픈 일들이 담담하게 기술되어 있는 편지를 읽으며 힘든 일을 겪고도 오뚜기처럼 씩씩하게 다시 일어선 지인들이 고맙다. 특히 노년기에 선 지인들의 건강소식은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 같다. 모두 한해를 무사히 살았으니 감사하다.
그래서 나도 편지를 쓰려고 노력해도 창밖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에 마음이 떨려서 도무지 집중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다 노트북을 닫았다. 혹시나 찰스 디킨스의 작품 ‘크리스마스 캐롤’이 연말을 느끼게 해주리라 싶어서 연극을 보러 갔다. 시대의 변천이 연극장에도 철철 넘쳐났다. ASF 예술감독이 작품의 무대장치나 언어의 율동을 기존의 고전적인 분위기와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새롭게 도입된 현대 기술의 활약이 재밌기는 했지만 이번 공연은 좀 부산스럽게 내 마음에 안겼다.
이렇게 머뭇거리는 사이 벌써 12월의 중반부가 가까워지자 밀리듯 테이블에 다시 앉았다. 노트북을 열자 이번에는 내 수다가 일사천리로 술술 나와서 단숨에 연말편지를 썼다. 우리 부부의 간단한 근황과 딸들의 소식을 알리니 모두가 감사한 일의 열거였다. 어린 손주 3명의 재롱에 히죽거리며 사는 복 받은 노인들인 우리 부부가 이제는 단순하게 사계절의 순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지인들에게 기쁘게 알렸다.
편지를 프린트해서 하나씩 크리스마스 카드속에 끼워 넣으면서 해마다 줄어드는 지인들의 숫자에 마음이 스산했다. 다른 세상으로 긴 여행을 떠난 그리운 얼굴들이 그립고, 양로원으로 이사한 지인들, 그리고 침묵으로 우리의 존재를 묵살하는 냉정한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러자 해마다 치루는 열병을 다시 앓는다. 떠난 사람과 잊힌 사람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순전히 내 몫으로 남아서 가슴이 아리다.
“요즘 카드 보내는 사람 없어. 그런 풍습은 고대의 공룡처럼 사라진 거야.” 어쩌다 나는 공룡이 되었나. 그 말을 해준 친구에게 나는 다시는 연말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서로를 기억하고 서로의 삶을 다독여주는 원근에 사는 지인들이 어쩌면 나와 같이 멸종을 거부하는 공룡들이라는 착각을 한다. 그래도 나는 우리들의 연례행사, 연말편지를 통해서 Reach out and touch하며 사랑을 나누는 따스함이 좋다. 나 죽을 때까지 멸종하지 않는 공룡이 되리라 각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