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 이민 120년을 맞은 올해, 애틀랜타 한인사회도 굵직굵직한 일들이 많았다. 이들은 모두 오랜 시간 공들인 정치력 신장 노력과 기업 진출 및 투자의 결실이었으며, 동시에 이민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의 표출이기도 했다.
본지 선정 2023년 10대 뉴스(12월 22일자 A-1,2면)에 드러난 사건 사고 및 여러 현상들을 바탕으로 애틀랜타 한인사회의 빛과 그림자, 새해 과제 등을 분야별로 심층 분석해본다.
◆글 싣는 순서
① 정치력 신장과 ‘새 정치'(상, 하)
② ‘그리스도의 군사들’ 사건과 이민사회(상, 하)
한인사회 벗어난 새 ‘한인 정치’ 기대
다큐멘터리 영화 ‘초선’의 조셉 전 감독
한인사회의 복잡한 정체성·가치관 조명
더욱 젊고 미국적인 한인 정치인 부상
미국 사회에 ‘한인적’ 관점 제공할 때
올해는 미주 한인 이민 120주년을 맞은 해였지만 한인사회는 여전히 미국의 영향을 불균형적으로 받는다. 그 결과가 민족과 인종, 신념의 불일치다. 더 이상 민족이나 인종이 같다고 해서, 신념까지 같아질 수는 없다. 민족이나 인종, 그리고 신념이 하나의 ‘정치적 패키지’가 아닐 수 있다는 접근 방식이 합리적이다. 한인사회 안에서도 세대간, 계층간, 종교간 ‘문화전쟁’이 심화되며 누가 우리를 대표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커지고 있다.
미국 선거 역사상 가장 많은 한인 후보가 출마한 2020년 하원의원 선거. 조셉 전(한국명 전후석) 감독은 당시 선거에 출마한 한인 후보들을 좇는 다큐멘터리 ‘초선'(CHOSEN)을 통해 미국 내 한인사회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정체성과 가치관의 충돌을 그려냈다. ‘초선’은 한국말로 ‘첫 당선’이란 뜻이기도 하지만 영어로 ‘선택받은’이란 의미도 지닌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의 영화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데이비드 김’이라는 인물이다. LA 한인타운이 속한 지역구에 출마했던 그는 한인 2세대이자, 이민 변호사, 그리고 성 소수자의 중첩된 정체성을 가졌다.
전 감독은 지난 18일 가진 인터뷰에서 “정체성의 정치가 지니는 균열점”에 대해 설명했다. ‘같은 핏줄’이라는 동일성을 바탕으로 대표자를 뽑아온 한인 이민사회가 이제는 ‘같지만 다른’ 한인을 만났을 때 동일한 정체성을 내세운 정치의 한계를 명확히 노출했다는 것이다.
전 감독은 “소위 ‘바이블 벨트’로 불리는 남부의 보수적 이념과 복음주의, 근본주의적 가치관이 내재화된 한인의 경우 영화 속 데이비드 김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이민자라 하더라도, 지역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문화적 지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같은 민족으로서 한인을 응원하는 마음과 보수기독교적 가치관이 충돌하는 것이다.
18일 조셉 전(한국명 전후석) 〈초선〉 감독과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조지아 한인 사회 역시 이러한 복합성을 띠고 있다. 2016년부터 내리 4선에 성공해 한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정치파워의 ‘선봉’으로 인정받는 샘 박(한국명 박의진) 주 하원의원은 미국 언론에서는 그가 소수계라는 점과 더불어 조지아의 첫 ‘오픈리 게이'(Openly Gay) 의원으로 부각됐다.
박 의원은 첫 당선 후 애틀랜타 저널(AJC)와의 인터뷰에서 의정 활동 원칙으로 “이민자, 무슬림, LGBTQ 커뮤니티를 보호하는데 앞장 서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한인 언론은 이를 다루지 않았다. 미국 언론은 이중의 차별 구조 속에서 이뤄낸 정치적 성과에 주목했지만, 한인언론은 오히려 선택적인 소수자성을 강화하는 한계를 노출했다.
정치인이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우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한국계 최초의 3선 연방 하원의원인 앤디 김 의원(뉴저지)에 대해 전 감독은 “지금과 달리, 초기 선거 캠페인은 한인이라는 정체성을 부각하지 않은 게 특징”이라고 분석했다. 앤디 김은 연방 하원이 되고 나서야 한국 정치인은 물론, 미주 한인 단체의 요구들이 그에게 쏠리며 ‘한인 고객’ 서비스를 도맡아 하는 의원이 됐다. “정치인은 직접 의제를 만들기도 하지만, 대중이 원하는 민심을 반영하는 ‘거울’로서 기능한다. 지역 사회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의원이 화답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만들어지는’, 진화하는 한인 대표라는 개념은 아직은 낯설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한다. 전 감독은 “진보적 정치 역사가 오래된 동부와 서부의 경우, 로컬 정치 역시 고착화된 측면이 있다”며 “애틀랜타가 속한 동남부의 경우, 스윙 스테이트(경합주)이기 때문에 오히려 지역 정치가 가진 한계나 선입견이 없다”고 진단했다. 정치 격전지로서 혐오와 갈등을 조장하는 분열정책이 거세지기도 하지만, 한 표가 절박한 정치인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소수계의 의제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욱 집중하고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2024년 연방 선거에 도전하는 한인 후보들은 더욱 젊고, ‘미국적’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한인보다는 아시아·태평양계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한인 정치인이 달라지면, 이들을 대하는 한인사회의 시각도 달라져야 한다.
전 감독은 “소수계로서 우리가 가지는 강점은 ‘인권적’ 접근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당파가 달라도, 이념이 달라도 한국계인 이상, 인종차별과 혐오범죄에는 힘을 합쳐 대응할 수밖에 없다. 동일시의 신화가 깨진 지금은 한인을 위한 한인 정치가 아닌, 미국 공동체에 한인적 관점을 제공하는 한인 정치인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이다.
장채원 기자 jang.chaewon@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