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밖으로 다양한 배경 환자들 포용하면서 안으로는 인종·성별·나이 차별없는 문화 조성”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특히 이민자들이 미국 생활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병원 가는 일이다. 진료 과정에서 언어적 장벽에 가로막히거나, 치료가 어디까지 보장되고,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이민 커뮤니티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병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의료산업의 대전제는 수익성과 경제적 이해관계를 떠나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치료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조지아주 최대 병원인 에모리대학 병원그룹의 이준섭 최고경영자(CEO)는 현재의 의료 시스템 문제로 “첨단 기술과 접근성의 괴리”를 지적했다.
미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세계의 의료기술을 선도해왔지만, 막상 첨단 의료 혜택에 접근할 수 있는 이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목적도, 방향도 없이 기술만 질주하는 셈이다.
그는 “단순히 찾아온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의 전반적인 건강 문해력을 높이는 것이 헬스케어 산업에 필요한 새로운 리더십”이라고 강조한다.
작년 7월 에모리 병원그룹의 CEO에 취임한 이 박사는 고 이주형 연세대 의대 교수의 아들이다. 아버지를 따라 9살 때 노스캐롤라이나주 모건턴이라는 작은 시골 도시로 이주했다. 그는 “우리 가족에게는 언제나 과학적 탐구와 호기심이 있었다”고 어린시절을 회고했다. 그런 가족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윤섭, 이인섭 두 형도 각각 한국과학기술원(KAIST) 양자컴퓨터 교수와 펜실베이니아대(유펜) 컴퓨터 공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형들과 달리, 이 박사는 기계가 아닌 사람에 이끌렸다. 다트머스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공부한 뒤, 곧장 듀크의대로 향했다. 그는 의학을 두고 “사람을 다루는, 가장 높은 단계의 응용과학”이라고 해석했다. “단순히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부품을 고쳐 해결하는 과정으로 본다면 공학과 같지만, 각자의 몸 안에서 질병을 겪어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깊게 보면 의사소통과 이해, 공감의 학문”이라는 것이 경험으로 체득한 그의 의학론이다.
실제 그는 의사로서 일하며 얻은 가장 큰 자산을 “환자와 형성한 일대일 관계”로 꼽는다. “심장전문의로서 그 사람의 전생애가 담긴 심장을 들여다 보는 흔치 않은 경험을 자주 한다.” 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자연스레 그 사람의 삶을 알게 되기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이제 대면 치료 현장을 떠나, ‘조직 관리자’로서 새로운 의료인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모든 환자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사회·문화·인종적 배경과 함께 병원을 찾는다”고 강조한다. 그 자신도 어렸을 때 받았던 문화적 충격을 잊지않고 이민자로서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병원 외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환자들을 포용하고, 병원 내에서도 인종과 성별, 나이로 인한 차별 없이 ‘일하고 싶은’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의료업계는 지속적인 수익성 저하, 인력 부족, 높은 인플레이션의 압박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에모리호’라는 거대한 병원 선단을 이끄는 선장으로서 “혼란 속에서도 환자와 가족을 잘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거듭 강조한다. “모든 환자들에게 필요한 때,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의료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핵심이다.
이 박사는 “물론 우리는 보험 회사도, 정부 기관도 아니기 때문에 의료 시스템의 규칙을 바꾸는 것에 한계가 있지만 시대의 변화에 맞춰 의료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선도하는 병원그룹으로 이끌고 싶다”고 다짐했다.
이준섭 CEO는 ‘사람 중심의 의료’ 발전과 혁신을 주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민자의 강점은 포용성…애틀랜타서 새롭게 도전”
“에모리의 전통은 사람 중심의 의료 발전 추구…
높은 다양성과 성장 가능성 지닌 애틀랜타서
병원 조직관리와 경영을 통해 혁신 주도할 터”
이준섭 박사는 1996년부터 피츠버그대학 메디컬센터(UPMC)에서 심장전문의로 25년간 일했다. 지난해 7월 에모리대학 병원그룹 대표직을 맡았다. 그가 이끄는 병원그룹에는 11개의 병원과 250개의 클리닉, 검사실 등이 포함돼 있다. 총 2만 4000여명의 직원이 일한다. 애틀랜타 다운타운 에모리대학 병원에 있는 이 박사의 사무실을 찾아 인터뷰를 가졌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오랫동안 진료와 연구 경력을 쌓았는데 애틀랜타로 오게 된 계기는.
“현장에서 치료를 담당하는 것보다 의료업계의 조직 관리와 경영에 점차 더 관심이 갔다. 애틀랜타는 높은 다양성과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대도시 지역이기에 선택했다. 아시안은 물론 흑인, 히스패닉계 인구도 많아 의료적 도전이 요구되는 곳이기에 흥미를 느꼈다.”
-다른 병원과 다른 에모리만의 특징을 든다면.
“우리는 환자 치료만큼이나 연구와 교육에 헌신하는 의료기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통적인 치료법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각 접근법의 장단점을 꾸준히 평가하고 혁신적인 치료법을 시도하기도 한다. 또 수익성만 강조하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사람 중심의 의료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문화를 유지해오고 있다. 특히 미국의 큰 한계로 지적받는 민간 중심 의료시스템에서 이러한 환자 중심 문화를 안정적으로 가꾸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오랜 기간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며 느낀 바가 있다면
“심장 전문의로서 많은 심장 질환 환자를 접했다. 나이와 상관 없이 하루 아침에 고장나 버릴 수 있는 기관이 심장이다. 삶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는 갈림길에 선 사람을 책임지고 대면한다는 것은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일이다. 삶과 죽음 앞에서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됐다.”
-1.5세 이민자로서의 경험이 의사로서의 직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민자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 중 하나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문화적 배경을 통째로 바꾸는 과정에서 부모님이 겪은 어려움이나 문화적 충격은 쉽게 잊을 수 없기에 환자를 대할 때 다른 이들보다 보다 섬세한 감각을 가지게 된다. 이민자로서 새로운 시각을 가진 이가 조직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을 때 가지는 포용성 등의 강점이 있다고 본다”
-의학도로서의 꿈을 꾸는 한인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미국은 아직 기회의 땅이다. 눈을 크게 뜨고 기회를 잘 찾아야 한다. 야망을 가지고 성실한 직업 윤리를 체득하되, 앞으로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고 싶은지도 깊게 생각해봤으면 한다.”
취재, 사진 / 장채원 기자 jang.chaewon@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