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에 2층 침대 16개 ‘알베르게’에서도 꿀잠
“인생은 소중하고, 사랑은 영원한 것이라오”
85세 노인 회한 가득 섞인 충고에 마음 울컥
#둘째 날
길을 나선다. 앞에도, 뒤에도 순례자들은 여전하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다. 오솔길, 숲길, 동네 길, 둘레길, 올레길, 세상의 길이란 길은 다 가져다 놓은 듯하다.
부녀가 같이 걷는다. 어제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도 만났던 부녀다. 딸이 몇 살이냐고 물었다.
“9 Years old!”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나도 화답했다. “You are a champion!” 엄지 척을 했다. 딸은 수줍게 웃는다.
다시 길을 걷는다. 비가 온 탓인지 개울은 물이 불어 소리 내어 흐르고, 여기저기 비 온 후의 흔적이 많았다.
조금 더 가니 유튜브에서 보던 것이 나온다. 한 남자가 개를 데리고 간다. 사람도 큰 배낭을 지고 가고, 개도 자기 짐을 지고 간다. 영어가 안 통한다. 스페인 말로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하나만 알아들었다. “이 개는 단순한 친구가 아니요, 내 인생 동반자요.”
한 순례자가 짐을 가득 진 개와 함께 걷고 있다.
오늘 목적지 빌야바(Villava)에 다 왔다. 알베르게에 도착, 이름도 빌야바 알베르게. 한 방에 2층 침대가 16개가 있다.
저쪽 구석에 있는 친구가 말을 건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젊은이.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다. 뭔가를 보이고 싶어하는 것같다. 가자고 손짓을 했다. 복도 밖으로 데려가더니 밖을 가리킨다. 제법 넓은 시내가 흐르고 있다. 또 어쩌고저쩌고.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다. 한참을 들어주다가 “땡큐” 하고 헤어졌다.
이렇게 카미노의 두 번째 밤은 저문다. 이 밤 자면 저 마을엔 꽃은 지리라. 그 꽂 지는 사연, 내일 들어보련다.
#셋째 날
오늘은 팜플로냐를 지나는 날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고 도시 전체가 문화재라고 하는 도시다. 카미노를 준비할 때부터 1번으로 손꼽던 도시였다.
팜플로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도시다. 팜플로냐 입구 성벽.
저기 눈앞에 팜플로냐 성문이 보인다. 들어가려는데 노인 하나가 비틀거린다. 베레모를 쓰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노인이 눈앞에서 비틀거린다. 급히 부축했다.
“Thank you, young man!” 영어다.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나눠진 대화. 캘리포니아 출신의 85세의 노인이다. 유튜브에 자기 이름을 치면 나온단다. 폰을 켰더니 이름을 댄다. 친절하게도 스펠을 준다. J. E. I. C… 사진과 함께 ‘hunter’라고 나온다. “사냥꾼이었소?”
사냥에 미쳤단다. 어려서부터 평생을 사냥만 했다. 사냥하면서 세상을 싸돌아다니다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단다. 그 뒤 사냥 병이 도져 아내도, 아들도 다 팽개치고 집을 떠났다. 미국에서는 더는 사냥할 것이 없어, 아프리카로, 인도로, 세상을 누볐다. 아프리카에서 코뿔소도 잡아보았고, 인도에서는 벵골 호랑이도 잡아보았단다.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 이정표. 야곱의 길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나이가 들었다. 한창 때에는 50m 밖에서 동물의 냄새도 맡았는데 지금은 눈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햇빛도 없는 이 아침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아내는 죽었고 하나 있는 아들과 여기서 살면서 지나가는 순례자를 보는 것이 낙이란다.
평생 아비 구실을 못했는데, 그래도 아들이 받아주어 이렇게 살고 있다고. 일어나면서 한마디를 했다. “기억하시오, 젊은이! 인생은 소중한 것이고 사랑은 영원한 것이요!”
85세의 늙은 영감이 66세 젊은 영감에게 남긴 말이다. “인생은 소중하고 사랑은 영원하다!” 그렇게 살지 못해서였을까? 그 뒷모습이 쓸쓸하기만 했다.
팜플로냐에 들어갔다. 웅장한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와- 한 마디. 고색창연한 건물이 좁은 길을 끼고 양옆에 주욱- 늘어서 있는데, 수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케케묵지 않았다. 신선했다.
나는 이런 도시를 사랑한다. 보기만 해도, 걷기만 해도, 아니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카테드랄 성당(주교좌성당) 앞에 섰다. 프랑스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섞여 있다는 14세기 최고의 걸작이다. 그 거대한 크기에 압도되었다. 이 대성당을 중심으로 그림과 같은 녹지가 이어지고 여기저기 서있는 오래된 건물들! 역사책 속을 거니는 것 같다.
오래된 성당 앞에서 쉬고 있는 순례자들
길은 계속되고 오르막길의 정상이 나온다. 여기에 오면 누가 만들었는지 조형물이 있다. 카미노의 랜드마크다. 그 앞에서 멋있게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다시 걷는다. 평탄한 길, 가파른 길, 산길, 초원길. 자연이 보인다. 자연이 선사하는 풍경들을 벗삼아 계속 걷는다. 마을을 지난다. 시간이 멈춘 듯이 숨겨진 마을들. 하나, 하나에 마음을 뺏긴다.
오르막길 정상에서 만난 조형물.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랜드마크다.
오늘도 25킬로를 걸었다. 많이 걸었고, 많이 만났고, 많이 보았다. 이런 하루를 보내면서 나는 믿는다. 오늘 내가 만난 모든 사람, 내가 걸었던 모든 길들, 내가 보았던 모든 것들! 이 모든 것들은 내 소중한 인생 속에 들어와 내 소중한 인생을 더욱더 소중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계속>
글·사진=송희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