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최근 ‘감자는 채소인가, 곡류인가’로 뜨거운 논쟁이 불붙고 있다. ‘미국인을 위한 식생활 지침’ 개정을 앞두고 감자를 채소에서 곡류로 분류하겠다는 논의가 이뤄지면서다. 미국인들이 감자를 많이 먹어 비만이 심각해졌다고 본 정부가 칼을 빼든 셈인데, 업계는 비만을 감자 탓으로 돌리지 말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지난 18일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지침은 정책 입안자·의료진·영양 지도사 등을 위한 가이드라인으로 5년마다 재검토된다. 현재 2025~2030년판 지침 개정을 논의중이다.
이번에 이슈가 된 감자는 5개 그룹(채소·곡물·과일·유제품·단백질)에서 ‘채소’다. 이를 개정위원회가 쌀 등 ‘곡류’로 분류하는 안을 검토 중이라고 외신들이 전했다. 위원회는 감자를 채소에서 빼는 대신 녹색잎채소 등의 비중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감자의 곡물 지정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감자가 가장 인기 있는 채소로 꼽혔기 때문이다. 지난달 7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2019년 미국인이 가장 많이 먹은 채소는 감자였다. 1인당 연간 감자소비량은 22.4㎏로 2위 토마토(14.3㎏)를 크게 앞질렀다.
감자가 비만의 적으로 몰리면서 채소에서 퇴출될 위기에 감자협회 등 이권단체는 거세게 반발했다. 픽사베이
오랫동안 채소로 분류된 까닭에 미국에선 감자만 먹어도 채소를 충분히 먹었단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문제는 감자가 고당분·고칼로리라는 점이다. 그래서 세계보건기구(WHO)도 채소·과일의 하루 400g 섭취를 권하면서도 감자·고구마 등 뿌리채소는 제외했다.
특히 미국인들이 감자튀김·칩 등 가공식품으로 감자를 섭취한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미국 감자 제품시장에서 냉동감자 비중이 50%다. 감자튀김은 학교 급식에도 나오면서 소아 비만의 원흉이 됐다. 하버드대 영양학과 겸임교수인 제롤드 만데는 WP에 “감자보다 감자 가공식품이 더 큰 문제”라며 “언젠가 우리는 감자 가공식품 섭취 탓에 얼마나 아프게 될 지 깨달을 것”이라 꼬집었다.
실제 미국 내 비만 문제는 심각하다. 미국 건강영양조사(2017~18년)에 따르면 성인 중 ‘비만'(BMI 30 이상)으로 판정받은 성인 비율은 42.4%였다. ‘과체중'(BMI 25~30)도 성인의 30.7%였다. 즉, 미국인 3명 중 2명이 살찐 상태다.
소아 비만도 심각하다. 미국 2~19세 비만률은 2017~2020년 19.7%에 달했다. 외신들은 “비만은 당뇨·심장 질환·암을 유발하고 정부의 의료 재정을 압박하며 심지어 비만 인구가 늘면서 미군의 모병 활동까지 지장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만으로 인해 2035년까지 매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만큼 경제 손실이 발생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됐다. ‘비만의 사회·경제적 손실’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세계 인구의 7명 중 1명이 비만에 의한 과체중으로 추정됐다. 2035년에는 인구의 4명 중 1명이 비만이 되고, 절반 이상은 과체중이 될 전망이다. 특히 코로나19 기간 동안 과체중 인구가 많은 국가의 사망률이 4배 가량 높았다.
미국 건강영양조사(2017~18년)에 따르면 미국 성인 3명 중 2명이 살찐 상태다. 로이터=연합뉴스
감자가 비만의 적으로 몰리면서 채소에서 퇴출될 위기를 맞자, 관련 단체는 거세게 반발했다. 미국 감자농가를 대표하는 캄 퀄레스 전국감자위원회 대표는 WSJ에 “정부가 감자를 채소에서 제외하려는 노력에 반대한다”면서 “아이들에게 감자는 채소를 먹기 위한 일종의 ‘관문’같은 것이고, 감자가 포함돼야 다른 채소도 먹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감자는 건강에 나쁘다는 인식을 불식하려 워싱턴 주 감자위원회 전무이사인 크리스 보이트는 2010년 60일간 감자와 케첩만 먹는 다이어트를 감행했다. 하루에 감자 20개를 먹으면서도 체중을 줄였다. WSJ에 따르면 보이트의 아내는 남편이 2개월에 걸쳐 21파운드(약 9.5㎏)를 감량한 결과, 코골이를 멈췄으며 콜레스테롤 수치도 낮췄다고 주장했다.
WP는 위원회가 실제로 감자를 곡류 카테고리로 바꿀지는 미정이며, 만일 곡류로 분류되더라도 1000억 달러(134조원) 규모의 감자 산업에 즉각적인 영향이 있을지는 불확실하다고 전했다.
감자는 미국 정권의 변화에 따라 부침을 겪어온 작물이라고 WP는 전했다. 앞서 버락 오바마 정권 때는 미셸 오바마 영부인이 소아 비만 타파를 강조하면서 학교 급식에서 감자칩 등 정크 푸드를 제외하고 채소·과일을 늘렸다. 그 뒤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면서 학교 급식에 감자튀김 등 고칼로리 메뉴가 부활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감자튀김 등을 즐겨 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