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씨 “신학교 입학 준비할 것”
“주변 사람들의 도움에 감사”
ID·은행계좌 개설등 사회 적응
한인사회 지원과 응원도 필요
하늘은 늘 교도소 담벼락 너머에 있었다. 스무살이 채 안 됐던 청년은 철창 속에서 어느덧 쉰살이 됐다.
누나의 동거남을 총격 살해한 혐의로 10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던 한인 장기수 앤드루 서(50·한국명 승모)씨가 자유의 몸이 된 지난 26일, 그는 교도소 문을 나서는 순간 고개를 들어 한동안 하늘을 바라봤다.
양아버지 김한철 장로(그레이스장로교회)가 전한 출소 당시 서씨의 모습이다. 본지는 지난 27일과 30일, 두 번에 걸쳐 김 장로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서씨와 함께 기자회견을 준비 중인 김 장로는 본지에 먼저 향후 계획을 밝혔다.
-서씨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27일 오전 9시, 김 장로와 전화 인터뷰를 처음 할 당시 경찰은 서씨에게 외출 및 외부인 접촉 자제 등을 요구했었다. 직접 인터뷰는 불가했다. 외출 자제가 완전히 풀린 건 지난 29일이었다.)
“원래 한 달 정도 외출 자제 요청을 받았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어제(29일) 다 풀렸다. 지금 한 교인과 함께 차량국(DMV)에 아이디를 신청하러 갔다. 은행계좌도 개설해야 하고, 운전면허도 신청해야 한다. 할 일이 너무 많다.”
-언제쯤 심경을 밝힐 수 있나
“19살 때 들어갔으니 지금 모든 게 생소한 상황이다. 출소하고 이틀 동안은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그만큼 모든 것이 새롭고 아직 꿈을 꾸는 것만 같다고 말할 정도다. 먼저 심리적으로 안정이 돼야 한다. 현실에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이해해달라. 언론 등 많은 이들이 앤드루와 접촉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먼저 부담감을 떨쳐낼 시간도 있어야 한다. 어느 정도 되면 앤드루가 직접 기자회견도 할 생각이다.”
-교도소를 나서는 서씨를 볼 때 심정은
(김한철 장로가 서씨를 처음 만난 건 1997년 5월이었다. 서씨가 수감된 지 4년째 되던 해였다. 그때부터 김 장로는 서씨를 양아들로 삼았다. 신앙적 조언 등을 하며 서씨가 모범적으로 수감 생활을 할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교도소 소장과 교도관 4명이 나와 앤드루에게 ‘사회에서 성공하길 빈다’며 따뜻하게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더라. 교정 당국에서 그런 식의 배웅은 처음이라고 했다. 감동이었다. 앤드루는 나오자마자 하늘을 바라보다가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하다며 기도를 했다. 정말 눈물이 나더라. 나는 ‘아들아, 얼마나 고생했어’라고 말하며 앤드루를 꼭 안아줬다.”
일리노이주 교도소를 나와 한인 후원자가 건네준 두부를 먹는 앤드루 서. 캔디스 챔블리스 변호사 제공 사진/ 시카고 트리뷴 화면 캡처
-서씨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앤드루는 늘 서원 기도를 했다. 청소년 사역 등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로서 처음에는 염려했는데, 앤드루의 마음이 워낙 확고하다. 그래서 지금은 아들을 위해 기도로 돕고 있다. 예수의 사랑으로 많은 이들에게 보답하는 아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지금 신학교에 갈 준비를 하려고 한다.”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
응답 :“나는 은퇴를 한 지 오래됐다. 아버지이긴 하지만 혼자서는 앤드루를 온전하게 돌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한인들이 앤드루를 위해 기도해주고 한마음으로 응원해줬으면 한다. 신학교에 갈 앤드루에게 조금이라도 재정적 지원도 해주면 좋겠다. 주변에서 돕겠다는 분들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모든 것을 투명하게 처리하려고 한다. 지원은 나를 통해서가 아닌 우리 교회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교회 측 계좌 사용 가능 여부도 물어본 상태다.”
-서씨는 출소 후 무엇부터 했나
“한인 식당으로 가서 순두부와 비빔밥을 먹었다. 음식이 나오는데 김치부터 먹더라. 역시 ‘한국 사람이구나’했다. 식사를 마친 후 교회부터 갔다. 그레이스교회 본당에 가서 나랑 같이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를 드렸다. 앤드루가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기도를 하더라. 이후 담임목사님이 오셔서 안아주시며 기도해주셨다.”
▶도움주실 분:(224) 522-9135
LA지사 장열 기자ㆍjang.yeol@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