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joy Chaos” 세상의 틀을 깨고 질문을 던지다
현대 사회 속 인간 사유와 통찰의 가치가 흐릿해진 오늘날, 디자인계에도 고유한 해석을 담은 분명한 메시지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기해야 한다는 흐름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인간 삶을 꿰뚫는 예리한 시선으로 디자인 너머의 의미를 내다보며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의 신성으로 떠오른 디자이너가 있다.
2023 런던 디자인 어워드(London Design Awards)에서 골드 위너로 2관왕에 오른 김예지(Yeaji Kim) 디자이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뉴욕 브루클린 소재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그래픽 디자인 전공으로 졸업 후 뉴욕 소재 글로벌 뷰티 기업 ‘키스 프로덕트(KISS Products)’에서 근무 중인 그를 만났다.
Q. 먼저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나의 어워즈에서 2관왕이라는 유례없는 기록이 인상 깊은데, 이번 성과가 본인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번에 제가 수상한 분야는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에서 타이포그래피&사이니지와 캠페인/애드버타이징인데요. 저는 2관왕에 올랐다는 것보다도 근본적으로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대하는 제 자세와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받는 것 같아 더욱 기쁩니다.
저는 디자인의 여러 가지 고려 요소 중에서도 특히 소통적 차원의 기능에 중점을 두는 편인데요. 유학생 신분으로 처음 미국에 오게 되었던 만큼,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학교 수업을 따라가야 한다는 점이 제게는 늘 부담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디자인을 전공하다 보니 저만의 언어로 작품을 해석하고 또 설명해야 할 때가 많았는데, 대개 추상적인 형용사들이 주가 되다 보니 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때를 기점으로 저는 언어나 문화 등의 장벽 없이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 안에 담긴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소통의 도구로서 디자인이 수행하는 역할을 직접 체감한 만큼 더욱 전달력 있는 메시지를 담아내려 노력하다 보니 그 진정성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을 통해 사람들에게 색다른 시각을 선사하고 기존의 경계를 허물어, 해석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하겠다는 포부가 잘 전달된 것 같아 영광입니다.
Q. 뉴욕에서 디자이너의 삶은 어떤가요? 지금의 직장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뉴욕은 디자인의 도시라고들 하죠. 어쩌다 그런 말이 생겼는지 충분히 납득이 갈 만큼, 뉴욕에서 지내다 보면 정말 많은 능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가까이서 접해 볼 수 있습니다. 새롭고 재미있는 디자인 프로젝트들이 쏟아지는 걸 보면서 더 많이 배우고 그 안에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디자인 타겟층의 인종 스펙트럼이 넓다는 거예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디자인을 통해 저마다 메시지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하는 디자인 프로세스는, 그야말로 디자이너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저는 현재 뉴욕에 본사를 둔 글로벌 뷰티 기업 ‘ 키스 프로덕트’ 에서 브랜드 비주얼 디자이너로 근무하면서 전시 부스나 디스플레이 디자인은 물론 사내 행사에 필요한 디자인, 모션그래픽, PPT 디자인 등을 전담하고 있는데요. ‘키스’ 라는 기업 자체가 대중에게 브랜드로서 어떤 이미지로 비춰질지에 대해 늘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에서 많은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 고민에 대한 결과가 눈에 띄는 반응을 불러일으킬 때의 희열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제가 입사하기 전에는 따로 브랜드 비주얼 디자이너(Brand Visual Designer)라는 직책이 없었던 터라 제 힘으로 새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게 어려울 때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무엇이든 시도하고 실행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감사함을 느끼고 있어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그 기획을 구체화해 디자인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더 많이 해 보고 싶은 욕심이에요.
Q. 이번 어워즈에서 수상한 작품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Enjoy Chaos”는 ‘혼돈을 즐겨라’ 는 뜻으로,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 24시간으로 구성된 시간 체계에 억압되지 않고 자유함의 상태에 놓였을 때 마주하게 될 혼란을 기꺼이 장려하는 캠페인입니다. 일과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미술관에서만큼은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시공간적 경험을 향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기획이었어요.
우선 이 프로젝트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효율성과 효율성이 만나 극강의 비효율을 만들어내는데서 시작하는데요.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산 세리프(San Serif)’체와 편리한 시간 표현을 위해 만들어진 24시간 체계를 결합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10개 종류의 산 세리프체를 24개로 분해한 후 재배열해 각각의 글자를 조합하니, 가독성이 확연히 떨어진 흥미로운 형태의 글자들이 탄생했죠.
Q. 파격적인 접근이네요. 이런 사고의 흐름을 이끌기까지의 디자인 철학에 대해 좀 더 들어보고 싶은데요
디자인은 ‘현명한 솔루션’을 도출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각에서는 디자인을 그저 예술의 영역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저는 비주얼 컨설팅의 영역으로 디자인을 바라봤을 때 무한한 확장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걸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시각화하는 게 바로 디자이너의 역할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평소에 디자인을 대하는 데 있어 최대한 제3자의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노력합니다. 제 디자인을 창작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다른 누군가의 시각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직접 느껴볼 때 좀 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게 되더라고요.
Q. 앞으로 디자이너로서 성취하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디자이너라고 해서 말 그대로 디자인에만 업무가 한정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결국 디자인을 통해 어떤 궁극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지, 시각적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겠죠.
저는 단순히 디자인의 영역을 넘어서 회사 차원에서 의사결정이 내려지는 프로세스를 방법론적으로 배워 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서,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MBA에 진학해보고 싶습니다. 이미 내려진 결정을 어떻게 시각화할지 고민하는 걸 넘어서서, 어떤 결정을 시각화할 것인지를 이해하며 입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한인 유학생 출신으로 미국에 와 뉴욕에서 커리어를 개진하고 국제 규모 공모전인 런던 디자인 어워드에서 그 실력과 신념을 인정받는 등, 나날이 글로벌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는 김예지 디자이너.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글로벌 뷰티 기업 ‘키스 프로덕트’에서 동반 성장을 이룩하며 디자인의 영향력을 확장해 갈 그의 밝은 앞날을 기대해 본다.
사진 / 김예지 디자이너 수상작. 런던디자인어워드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