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24)
나의 살던 고향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무가 있다.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던 커다란 해나무다. 해나무의 정확한 이름은 회화나무나 홰나무가 맞지만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해나무라 불렀다. 마을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 그래서 해도 달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나무였다.
한 사람이 나고 자라는 마을에는 그 마을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정서와 문화가 있다.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당사나무는 사람이 모이는 광장으로, 아이들에게는 놀이터로, 어김없이 변하는 계절을 알려주며 마을 이야기를 만들고 이어 주었다.
그림책 〈House Held Up by Trees〉의 글쓴이 테드 쿠저는 시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한 시인이다. 이 그림책은 함축적 의미를 은유적으로 써내려간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게 사유의 가지를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게 한다. 그래서 어른이 읽어도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나의 속단일지도… 이정표가 필요 없는 아이들은 어디로든 자유롭게 길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나무들이 들어 올린 집을 보았어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라고 시인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버지는 빼곡하게 자란 나무들을 잘라내고 밑동까지 싹 뽑아낸 땅에 집을 짓는다. 집에서 저만치 떨어진 곳, 남겨진 숲에서 어린 남매는 아버지가 부지런히 새싹을 뽑고 기계로 잔디를 깎는 것을 보며 자란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더 많이 날아드는 씨앗에 맞서서 아버지는 온종일 일하고, 힘든 저녁에도 잔디밭을 말끔하게 정돈한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 어느덧 청년이 된 남매는 도시로 나가고, 남매가 떠난 집에서 아버지 홀로 집을 깨끗이 정돈하며 살다가, 집과 잔디밭을 가꾸는 일이 버거울 만큼 늙어, 아버지도 도시의 아파트로 이사를 한다. 집 앞에는 ‘FOR SALE’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지만 집을 사려는 사람은 없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점점 허물어져간다.
몇 년이 지나자, 가끔 들리던 아버지도 더 이상 오지 않고 숲에서 날아든 씨앗들은 어린 나무가 되어 자란다. 지붕널이 빠진 자리로 빗물이 들어 군데군데 썩은 집안에서도 나무가 자라고, 이제 크고 튼튼하게 자란 나무들이 집을 들어올리기 시작한다. 나무들이 힘을 모아 높이 떠받친 집, 초록 향기가 바람결에 실려 드나드는 집, 나무 속의 나무 집이다.
몽고메리에 살면서 나무가 너무 쉽게 잘려져 나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가지치기를 하러 온 정원사가 차고 옆 나무의 밑동까지 자르고 간 것을 보고는 화를 내기도 했다. 나무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런 마음이 뒤섞여서 한동안 밑동을 바라보지 못했다. 하지만 몇 해 살다보니, 집 벽면에 붙어 자라는 나무는 진짜로 집을 들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집 쪽으로 뻗은 나무뿌리가 차고 앞 시멘트 바닥을 쩍 갈라놓고서야 정원사의 판단에 고마워했다.
삶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거스를 수밖에 없지만, 결국 자연의 순리에 따라 덧없이 허물어지는 아버지의 집은 자연과 인간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특별한 사건 없이 담담하게 하루하루 씨앗과 벌이는 아버지의 치열한 사투는 세월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연만이 허물어진 집이 쓰러지지 않게 떠받쳐서 다시 높이 올릴 수 있다.
광활한 자연 앞에서 인간은 미약하고 모자라는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지, 이 집에는 엄마가 없다. 얼굴이 보이지 않거나 뒷모습뿐인 아버지와 남매만 산다. 이 땅이 그렇듯, 우리 삶의 원래 주인은 자연이고 인간은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 같은 존재라고 시인이 노래하는 것 같다.
지구온난화로 전 세계에서 이상기후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보도와 함께 기업들의 탄소배출권 확보에 관한 보도도 이어진다. 탄소배출권은 제품 생산 때 배출되는 탄소를 줄이는 게 아니라, 배출하는 탄소량만큼 산림 보존을 위해 돈으로 지불할 수 있다. 우리 마을의 당산나무 주인도 돈 많은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지나친 기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