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짐, 날마다 빨래하고 말려야
순례자 숙소 남녀 구분없이 함께 사용
불편해도 배려와 웃음으로 ‘땡큐, 땡큐’
#4일째
오늘도 걷는다. 들을 지나고 실개천도 지나고 산길도 지난다. 끝이 없는 이 길을 하염없이 걷는다. 독특하게 생긴 마을이 나온다. 거북이 등에 조개가 붙은 것과 같은 동네, 유서 깊은 동네다. 마을의 인구가 백 명도 안 될 때부터 전쟁의 와중에 휘말렸단다.
중앙에 성당이 있다. 평소에는 성당이지만 전시에는 성이 된다. 이런 적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농기구를 들고 성당에 집결하여 농성을 펼쳤다. 항복도 하지 않고 죽도록 버틴 이들에게 적 영주는 엄청 분노했다. 성당을 봉쇄하고 쥐새끼 한 마리도 통과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항복도 받아주지 않고, 굶어 죽게 만들었다. 결국 어린아이 14명을 포함한 주민 전원이 굶어 죽었다.
나중에 이 일을 안 이 지역 영주가 시신을 거두어 영주 묘에 안장시켰고, 그것이 저 동구 밖에 있단다. 참으로 비참한 이야기다. 비극, 비극, 말을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이 무엇이겠는가? 굶어 죽는 것이고, 그것도 자식이 굶어 죽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새처럼 생긴 성당. 평시에는 성당, 전시에는 요새가 된다.
그 현장으로 발을 옮긴다. 무거운 발걸음을. 현장이 다가온다. 고통의 소리, 절망의 소리가 들려온다.
전에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원한의 소리가 들렸다. 같은 소리다. “엄마, 배고파.” 나중에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꺼져가는 눈빛. 그것을 바라보며 통곡하는 부모들. 이 슬픔과 절망을 어쩌란 말이냐?
기도했다. 특별히 아이들이 묻힌 곳을 짐작하면서 기도했다. “사람으로 태어나지 말기를! 공중 나는 새로, 들에 핀 백합화로 태어나기를!”
오늘도 길에서 하루를 시작해서 길에서 하루를 마감한다. 이 고개만 넘으면 오늘도 끝이다. 멀리 알베르게가 보인다. 날개를 접는다. 날개를 접은 새처럼 알베르게 속으로-.
오늘은 이 마을에서 하루를 묵는다.
#5일째
도시를 통과한다. 도심을 지나려니 복잡하다. 카미노 표지판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길을 잃지 않는 것은 잘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두리번거렸더니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가르쳐준다. 사거리에서는 오토바이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준다. 이렇게 방향을 잡고 계속 걷는다. 한참을 가면 하나씩 하나씩 합류를 한다. 신통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다가 잊어버리지도 않고 찾아오는지?
여전히 풍광이 좋다. 낮은 산, 넓은 들, 깨끗한 시내, 그림과 같은 마을들. 기온은 섭씨 21도, 쾌적하다. 도중 샐러드 한 접시와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원래 샐러드와 커피는 궁합이 맞지 않는 법. 그러나 워낙 야채가 신선해서 그런지 여기서는 한 궁합 한다.
걷다가 지치면 쉬어간다. 이런 곳에서 목을 축인다.
걸은 지 5시간이 되었다. 지치기 시작한다. 아직 2시간을 더 걸어야 하는 데 지친다. 저 멀리 고개가 보인다. 저 고개를 어찌 넘어야 하나? 하고 있는데, 고개 너머에서 악기 소리가 들린다. 아코디언 소리다. 산타 루치아가 들려오는데 보통 솜씨가 아니다.
저 멀리 순례자 하나가 길목에 자리를 깔고 아코디언을 치면서 모금을 하고 있다. 이 모금으로 카미노를 하는 순례자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주저앉았다. 부스럭부스럭 초콜릿을 꺼냈다. 한 조각씩 나눠 먹고 신청곡 하나를 부탁했다. 에레스 뚜-. “영원히 사랑한다던 그 맹세…바람아 너는 알겠지….” 이런 젊음의 노래를 여기서 듣다니, 호강도 이런 호강이 없다.
순례길에서 만난 아코디언 연주자. 모금하면서 순례길을 걷는다.
지친 가운데 길을 걷는다. 앞에 네 사람, 옆에 한 사람. 여섯밖에 안 남았다. 옆 사람, 뷔에뉴라고 소개를 하는데 프랑스에서 왔다. 자기소개를 한다. 65세. 3년 전에 은퇴했다. 은퇴를 너무 빨리한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때는 법이 그랬단다. 이번에 법이 바뀌어서 지금은 64세가 정년이란다. 얼마 전에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이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정년을 연장했다고 하더니 그 이야기인 듯하다.
이렇게 카미노의 5일째가 저문다. 생각해 본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가는 길은 무엇일까? 그 대답을 알베르게에서 찾았다.
알베르게는 순례자 숙소다. 별로 크지 않은 방에 2층 침대가 10개에서 20개 정도가 있다. 그러니까 한 방에 20명에서 40명이 머문다. 남녀가 따로인 알베르게도 있지만 대부분 혼숙이다. 화장실도 샤워실도 함께 쓴다. 짐을 줄이기 위해 속옷과 양말도 몇 개뿐이다. 날마다 빨아야 한다. 말리는 것도 함께다. 불편하기 그지없다. 거기에다가 하루에 몇 십 킬로를 걷는다. 고생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누구도 인상 쓰는 사람 없다. 큰소리도 나지 않는다. 순례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지 언제 만나도 웃음이고 무엇을 해도 땡큐다. 공중도덕을 아주 잘 지키고 사소한 것에서도 배려하고 양보한다.
그렇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 가는 길! 이 길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길이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와서 아름다운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야고보의 길이다.
오늘 밤에는 야고보서를 읽어야겠다. 그 야고보와 이 야고보는 다른 야고보일지라도 오늘 밤에는 야고보서를 읽으련다. 주시는 은혜가 클 것이다.
글·사진=송희섭(애틀란타시온한인연합감리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