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회 통해 정신건강 실태 파악 병행
한인 A씨는 치매가 의심되는 노모와 검사를 받아보려 병원을 방문했지만, 인지 능력 검사가 온통 영어로 된 탓에 제대로 된 판정을 받기가 어려웠다. “일일 연속극의 배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진술에도 한국 문화가 익숙지 않은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가정 내 불화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한인 B씨는 ‘정신질환자’라는 낙인이 두려워 아예 병원을 찾지 않는다. 의료보험이 없어 경제적 부담이 큰 점도 치료의 문턱을 높힌다.
아시아태평양계(AAPI) 이민자들의 정신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지난 3일 출범한 비영리단체 P.E.A.C.E.(이하 피스)는 이민사회의 이런 문제점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피스는 조지아주 내 한인 대상 정신과 치료를 지원하는 최초의 단체다. 정신과 전문의, 사회복지사, 대학교수 등 다양한 전문가가 모여 설립했다.
데이빗 김(한국명 김대수) 대표는 “일생 동안 겪은 이민 경험은 개인 또는 집단에 일종의 트라우마를 남긴다”며 “다양한 사례를 통해 한인의 삶을 연구함과 동시에,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정신과 치료를 나누고 싶다”고 밝혔다.
심리치료사인 김 대표는 노크로스 소재 상담교육연구소 라이스(R.I.C.E.)를 11년간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인사회에 다가가는 비영리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우선 비용이 많이 드는 정신과 상담 문턱을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석사 학위 상담사만 하더라도 평균 시간당 250달러의 상담비가 든다. 시간당 600달러를 요구하는 전문의도 많다”며 비싼 상담료로 인한 장벽을 낮추겠다고 밝혔다. 단체는 우선 5만 달러 이하의 연소득자를 중심으로 무료 상담을 늘려갈 계획이다.
한인 이민자들의 특수성을 상담에 녹여내는 것도 중요하다. 출범식에 참석한 심영례 조지아 귀넷 칼리지 심리학 교수는 한인 사회의 세대 구분이 심리 상담에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미국에서 태어난 이들을 1세대로 보는 미국사회의 분류법과 달리, 한인들의 경우 개인의 이민 시점을 기준으로 세대를 구분한다. 한국에서 태어난 후 성인기를 지나 이민한 이들을 1세대로 보는 것이다.
또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유년기에 이민 온 세대를 가리켜 ‘1.5세’라고 일컫는 것도 한인사회만의 특징이다. 심 교수는 “집단마다 정체성과 가치관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이민 역사를 잘 이해하고 세대마다 상담법을 달리하는 전문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윤준 조지아주립대(GSU) 사회복지학 교수 역시 “이민자의 우울증, 불안 장애 등은 이주 국가에서 경험한 차별과 부당 대우 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데, 한인 1세대는 2세대에 비해 차별 경험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고 세대간 차이점을 분석했다.
또 1세대의 경우, 이미 학습된 가부장제와 위계질서 등으로 정신건강 문제를 개인의 약점으로 생각하고,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히 크다고 그는 덧붙였다.
한인 커뮤니티의 비영리 복지단체 대부분이 종교적 성격을 띠는 데 반해, 피스는 종교와 거리를 둘 방침이다. 김 대표는 “기도 등 개인의 헌신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종교기관의 남성 중심적 문화도 우리가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상적인 모범적 삶과 개인 수양을 강조하는 문화가 오히려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피스는 홈페이지(aapi-peace.org)를 통해 상담 신청을 받는다. 무료 상담 지원 외에도 올해 4차례의 설명회를 개최하며, 한인 커뮤니티의 정신건강 실태 파악에 나설 예정이다.
장채원 기자 jang.chaewon@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