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비 소리에 깨어나서 다시 잠들지 못했다. 어둑한 집안을 서성이던 내 머리속에서 어떤 선율이 떠다녔다. 곰곰 생각하니 그것은 슈베르트가 작곡한 괴테의 시, ‘방랑자의 밤 노래’ 였다. 얼른 시를 찾아 다시 읽었다.
‘모든 산봉우리 위로는/ 고요함이 깃들고/ 모든 나무 꼭대기에는/ 전혀 느낄 수 없네/ 어떤 숨결도/ 새들도 숲에서 침묵하네/ 기다리라/ 머지않아 그대 또한 쉬게 되리니’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거들먹여서 인가 이 시에 묘사된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으로 내려오던 고요가, 그 평화로움이 흔들렸다. 하지만 어김없이 밖의 정경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됨을 알렸다.
집안의 어디를 가든 아이패드를 끼고 다니며 나는 슈베르트에 몰두했다. 많은 시에 곡을 붙여 민요풍의 가곡을 지어 가곡왕으로 불리는 그의 유명한 작품 ‘송어’나 ‘마왕’은 극과 극의 스토리에 풍부한 감정을 보탠 참으로 멋진 노래다. 감미롭고 부드럽게 감성을 촉촉하게 해주는 멜로디를 들으면 시와 음악이 하나가 되어 영혼에 닿는다.
그중 19세기 독일의 서정시인 빌헬름 뮐러가 쓴 연작시를 슈베르트가 작곡한 연가곡 ‘겨울 나그네’는 해마다 겨울이면 즐겨 듣는다. 독일의 멋진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이 부르는 것을 듣거나 역시 중후한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가 부르는 ‘겨울 나그네’ 의 24 곡을 들으면 한동안 흐느적거린다.
‘겨울 나그네’는 실연당한 주인공이 그를 떠난 여인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감추지 못하고 아파하며 여자의 집 앞을 배회하고 그녀와 만들었던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랑하며 고통받는 스토리다. 열정적으로 쏟아내는 많은 회상들에 흘리는 그의 뜨거운 눈물을 하얀 눈과 얼음이 차갑게 흡수한다. 혹시나 그녀가 다시 연락할까 희망을 가지는 것도 안스럽다.
막연히 걷는 그의 발자국은 소리가 없고 그가 보는 것 만나는 것, 아름답고 밝았던 정경이나 심지어 꽁꽁 언 강물도 그가 서럽게 쏟아내는 괴로움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어둡고 절망적인 스토리지만 선율은 감미롭다. 하지만 마음을 조이는 노래를 이렇게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날에 들으니 비가 눈으로 바뀌듯 나도 싸늘함에 휩싸였다.
20대 젊었을 적에 피셔-디스카우가 부른 ‘겨울 나그네’를 듣고 가슴이 서늘했던 적부터 나는 이 곡을 좋아했다. 그때 ‘보리수’나 ‘거리의 악사’를 들으면서 나도 사랑을 했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상상의 세계에 마취되었을 적에 명동의 한 음악실에서 옆에 앉은 남자친구에게 민망하도록 나는 이 곡을 주문했었다.
그것이 불길한 징조였을까? 겨울 방랑자가 사랑하던 여자가 더 나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버렸듯이 나도 내 남자친구를 떠났다. 여자의 마음은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갈대다. 그러나 나는 그녀나 나는 처음부터 진실한 사랑을 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이번에 요나스 카우프만이 안겨주는 느낌에 얼얼해서 마치 내가 다시 20대로 돌아간 듯 감상적이고 환상적인 꿈을 꾸었던 시절에 푹 빠져서 주말을 보냈다. 뮐러의 시에 슈베르트가 새로운 생명을 부어 넣은 ‘겨울 나그네’의 뛰어난 서정성과 짙은 슬픔이 묻어나는 흐름은 특히 겨울에 들으면 더 감칠맛 난다. 마치 나도 무거운 발걸음으로 눈 덥힌 하얀 들판을 헤매고 다니며 아름다웠던 과거를 회상하고 그 흔적을 잡으려고 몸부림치다 지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리운 연인을 떠올리며 내가 흘린 눈물은 얼음이 되어 눈 위에 떨어졌고 그것이 녹아서 강으로 갔다고 믿었다. 비록 강위는 단단한 얼음으로 요동이 없지만 그 아래로 흐르는 세찬 물살이 있음을 아는 내가 아직 살아있음이 좋았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변하는 사람처럼 사랑도 변한다며 ‘겨울 나그네’ 방랑자의 고통에 가슴 먹먹하다가 ‘솔베이지의 노래’를 떠올렸다. 젊은 솔베이지가 타지로 떠난 연인을 기다리다 백발의 노인으로 변해도 약속한 사랑을 지킨다는 애절한 노래다. 나는 사랑을 버린 여자와 사랑을 지키는 여인의 어느 쪽에도 서지 않는다. 사랑이 요구하는 많은 고초와 싸울 용기가 부족한 탓이다. 천재 시인과 작곡가의 명작품을 즐기면서 현실에서 사랑이 가진 다양한 얼굴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사랑은 아름답다’는 말에는 반감이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