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시니어 프로그램에서 경상도 산골 출신의 노부부를 알게 되었다. 경상도 사투리에 키가 아담하고 평범한 장로님은, 나와 동갑내기로 팔십 대 중반의 나이에도 팔팔 하고 건강해서 노인이라고 부르기엔 젊어 보인다. 그의 가슴에는 월남 참전용사 금빛 배지가 빛난다.
장로님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경상도 산골에서, 나는 충청도 산골에서 가난하게 자랐고, 6·25전쟁도 겪었고, ‘초코래또 기미’ 하고 미군에게 손도 벌려 보았고, 보릿고개 넘으며 배가 고파 송기며 칡뿌리 캐어먹던 경험도 같다.
화전민의 아들인 나는 전쟁후에 서울로 가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고, 교사가 되고, 미국유학을 오고, 학교에서 생활하다가 은퇴한, 한 우물을 파고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지만,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의 전성시대는 나와는 다르게 넓은 세상에서 모험적이고 생동적이다.
그분은 국방의무 연령이 되었을 때 이왕이면 육군보다 해군에 입대했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려 자진해서 월남전에 참가했다. 태평양을 누비며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가 고향, 가슴 속 끓는 피를 고이 바치자’라며 해군가를 불렀다. 해군으로 복무하며 이등 항해사 자격을 땄다.
군에서 제대후에 한국 안에서 극심한 취직경쟁에 시달렸다. 문득, 월남에서 해군으로 협력하며 알게 된 미국 해양 운송회사가 생각나서 취직을 알아보았다. 그가 가진 이등 항해사 자격증은 명문대 졸업장이나 고급학위 보다 효과가 있었다. 월남에 있는 미국회사에 취직되어 월남으로 가서 4년 동안 일했다. 그동안 번 돈으로 서울에서 큰 집을 샀다. 국내 취직경쟁에서 성공적으로 좋은 직장을 잡은 친구들은 그런 집을 살 엄두도 못 냈다. 결혼도 하고 아이들과 더불어 잘 살았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영화배우나 부잣집 부인들이 아이들만 데리고 미국에 가서 기러기 부부로 살기도 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는 가족들도 있었다. 그도 아이들이 셋, 자녀 교육을 위해서 미국에 보내고 싶었다.
전에 4년 동안 일한 미국회사 주소를 찾아, 편지를 보냈다. 대학원 입학원서를 보내고 입학여부를 기다리듯, 노심 초사 기다렸다. 드디어 초청장이 왔다. 그들 부부는 각오했다. 미국에 가면 열심히 일 해서 애들 교육을 잘 시키겠다고.
미국에 와서 이일 저일 오랜 동안 열심히 일한 결과로 모인 돈으로 마이애미에 빌딩을 샀다. 목도 좋고 상점도 여럿인 빌딩이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미국에 왔지만, 정작 그들 부부는 일에 바쁘고 4 남매를 살던 지역 공립학교에 보낸 것이 전부였다.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 이름난 사립고등학교나 학원에 자녀들을 보내는 한국 부모님들 소문을 들으면 그들 부부는 불안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큰 딸은 사는 지역 공립학교에 다니며 자신의 진로도 정하고, 동생들의 진로도 도와주며 바쁜 부모의 역할을 했다. 큰 딸이 스탠포드에 장학생이 되고, 다른 세 자녀들도 다 하버드를 비롯한 명문대학에 입학이 되었을 때야, 애들을 위해서 학원이나 사립학교에 관심을 둔 주위 사람들이 그들 부부에게 애들을 성공적으로 교육시킨 비밀이 뭐냐 고 물었다. 애들 교육때문에 미국에 왔지만, 애들 교육을 위해서 특별하게 한 것이 없다고 사실대로 말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들 부부는 자식들이 잘 자라준 것도 하나님의 은혜여서 그저 고맙고 감사하다고 한다.
가게들도 모두 쉬는 공휴일에 장로님 부부는 그들 소유의 빌딩안으로 들어가 세를 준 여러 상점들의 건물상태와 청소 상태를 점검하려 할 때였다. 모자를 눌러쓰고 색안경을 쓴 덩치 큰 흑인 두 명이 손에 권총을 들고 그들 앞에 나타났다. 돈을 내 놓으라고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부부는 순순히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했다. 지갑과 핸드백 속에 든 돈을 다 내놓았다. 시계와 반지까지도 내 놓았다. 강도들은 건물에서 도망 갈 때 바로 경찰에 보고할 수 없게 주먹을 날려 그들을 기절시켰다.
응급실에 실려가고, 부러진 갈비뼈를 치료받았다. “놈들이 총을 쏘지 않고 칼을 쓰지 않아서 이렇게 살아난 것만 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때, 그 사건을 이젠 은퇴하라는 뜻으로 생각했지요. 그래서 건물을 팔고, 은퇴하고 마이애미에서 여기로 와서 살아요.”
한국인의 성공비결은 생존을 위한 노력이라고 한 외국학자가 말했다. 장로님과 나는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높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서 열심히 산 결과이기에 돌아보면 가난이 우리의 축복이었다. 깡촌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새로운 진로를 찾아 세계를 누비며 현명하고 성실하게 살아오고, 그들 자녀들에게 넓은 세상으로 인도한 장로님 부부의 이야기가, 인디아나 존스 영화보다 더 실용적이고 모험적이고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