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스 판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가 자택에서 동갑내기인 부인과 동반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지난 10일 AP통신 등에 따르면 판 아흐트 전 총리와 부인 외제니 여사는 지난 5일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판 아흐트 전 총리가 생전에 설립한 ‘권리포럼’ 연구소는 “판 아흐트 전 총리 부부가 고향인 네이메헌에서 함께 손을 잡고 죽음을 맞이했고 장례식은 비공개로 치렀다”고 발표했다. 헤라르 존크먼 소장은 네덜란드 공영방송 NOS에 “판 아흐트 부부가 모두 매우 아팠고, 서로가 없이는 떠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변호사 출신인 판 아흐트 전 총리는 기독민주당(CDA)의 초대 지도자였고, 1977~1982년 총리를 지냈다. 그는 2019년 팔레스타인 추모 행사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네덜란드 언론에 따르면 그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항상 ‘내 여인’이라고 부르며 70여년을 해로한 아내와 함께 자신만의 길을 선택했다. 유족으로는 세 자녀가 있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화려하고 독특한 언어, 명확한 신념, 인상적인 연설로 양극화와 정당 혁신의 시기에 네덜란드 정치에 색채와 실체를 부여했다”며 조의를 표했다.
이번 사례와 같은 동반 안락사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네덜란드에서도 드물다. 네덜란드는 6가지 조건 아래에서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환자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치료 가망이 없고,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죽음에 대한 소망을 밝힌 경우 등이다.
2022년 한해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를 택한 사람은 총 8720명으로, 전체 사망의 5.1%를 차지했다. 하지만 동반 안락사는 네덜란드에서도 흔치 않아 2020년 13쌍, 2021년 16쌍, 2022년 29쌍에 불과했다. 매년 1000여 명의 안락사를 돕는 네덜란드 안락사 전문센터 대변인 엘케 스바르트는 동반 안락사 요청에 대해 “늘고 있지만 여전히 드물다”며 “두 사람이 동시에 치료에 대한 가망 없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 함께 안락사를 원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말했다.
유럽에선 스위스·벨기에·스페인 등에서도 안락사가 합법화된 상태다. 미국은 10여개 주에서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고 있다. 스위스는 외국인의 조력 자살을 허용한다.
한국에선 2018년 2월부터 시행된 연명의료결정제도에 따라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체외생명유지술, 수혈, 혈압상승제 투여 등의 연명의료를 거부할 권리만 있다. 종교계와 의료계는 “자살을 부추길 수 있고, 사회·경제적 약자가 존엄사란 이름으로 죽음을 강요당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백일현 기자 baek.ilhy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