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만났던 노숙자들 지금 대부분 사라져
트라우마·만성질환 탓 갑작스런 죽음 맞기도
애틀랜타 다운타운의 ‘퐁세 드 레옹’ 애비뉴는 19세기 지어진 이름이다. 1860년대 후반 철도 건설 와중 발견된 샘물을 마시니 노동자들의 아픈 몸이 나았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헨리 윌슨 의사가 젊음의 샘을 찾던 16세기 탐험가 후안 폰세 데 레온의 이름을 따 상품으로 홍보하며 이름이 굳어졌다. 애틀랜타의 명소 폰스시티마켓도 이 이름을 따왔다.
16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 거리 귀퉁이에는 고리대부업체 ‘에이스 캐시 익스프레스’가 들어서 있다. 점포가 문을 닫는 일요일에는 홈리스가 머무는 거리다. 이 곳에서 직선 거리로 1.45마일 떨어진 스윗 어번 역사지구까지 열댓개의 홈리스 텐트촌이 다리 밑 또는 공원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흑인 밀집 거주지역인 만큼, 대다수가 흑인이다.
I-85 고속도로 교각 밑 텐트촌에서 벤자민에게 음식을 전달하고 있다.
둘루스에 거주하며 직장을 다니는 신지혜(32), 신지은(29) 씨는 매주 일요일 아침 이들을 위해 음식을 나른다. 올해로 4년째다. 언니 신지혜 씨의 제안으로 시작돼 이제는 아버지도 운전을 도우며 함께 동행한다. 해외 선교를 주요 연례 행사 중 하나로 치르는 한인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니 국외로 자원봉사를 가는 또래를 많이 접했다. 2006년 미국에 온 뒤 영주권 수속 중이었던 두 자매는 입출국이 자유롭지 못해 ‘가까운’ 이웃으로 눈을 돌린 게 봉사의 시작이었다.
▶보이지 않는 거리 사람들= 애틀랜타 한인사회가 자리잡은 애틀랜타 동북쪽 교외지역은 애틀랜타 다운타운과 공간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뚜렷하게 분리돼 있다. 도심지와 교외지역의 분리가 선명한 만큼 거리를 떠도는 노숙인은 철저히 비가시화된 존재다. 교외와 다운타운을 나누는 마음의 담을 넘어 스스로 의식적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노숙인과 같은 빈곤 문제와 마주칠 일이 적다.
노숙인 보호단체인 애틀랜타 미션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애틀랜타 홈리스 인구는 2600명 정도로 추산된다. 노숙인의 81%는 신체적, 성적 학대를 당한 적이 있으며, 그로 인해 58%가 트라우마 증상을 호소한다. 57%는 만성질환을 앓고 있으며 30%는 알코올 또는 약물 중독자다.
조지아주 홈리스 1만명 중 4분의 1 이상이 애틀랜타 시에 머문다. 이들 중 관련 기관이나 단체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노숙인은 최대 700명 가량이다. 특히 거리에서 지내는 홈리스의 경우 만성적인 노숙 생활에 익숙해져 접근이 어려운 동시에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로 분류된다.
일요일 아침 6시30분 집에서 종이 봉지에 준비한 음식을 담는 신씨 가족.
▶약속하지 않은 약속 지키기= 신 씨 자매가 만드는 음식 가방은 매주 25개. 바나나 등 과일과 작은 과자 봉지, 에너지바, 빵 등을 넣어 꾸린다.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길에 맥도날드 매장에 들러 갓 만든 머핀도 하나씩 사 넣는다. 아침 8시부터 30분 간격으로 홈리스와 맺은 ‘암묵적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미리 주문을 넣어둬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위험한 환경에 노출돼 있는 홈리스와 시간 약속을 한다는 건 다소 어불성설이다. 신지은 씨는 “4년 전 처음 만났던 이들은 대부분 사라졌다”며 “만성질환, 폭력 등 다양한 이유로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노숙인 부부의 남편이 어느날 영문도 모른 채 다리 밑에서 시신으로 발견돼 홈리스 간 갈등이 격화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기자가 두 자매와 동행한 지난 4일에는 스카티를, 11일에는 루이와 샘을 만나지 못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차량 사이에서 위험하게 구걸하던 멀린은 11일 처음 만난 얼굴이다. 다운타운으로 이어지는 I-85 고속도로 교각 밑 텐트촌에 머무는 벤자민은 비교적 오래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주에 그가 요청한 AA배터리 몇 개를 음식 가방에 함께 넣었다. 지혜 씨는 “라디오를 부탁해 서너번 사다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통증 완화 스프레이, 겨울용 외투, 침낭 등 요청 사항은 때마다 달라진다. 다만 현금은 부탁하더라도 주지 않는다.
음식 봉지에는 성경 구절도 써 넣는다.
퐁세 거리서 만난 크리스 역시 농담을 주고 받는 오랜 친구다. 그는 영하의 기온에 얇은 겉옷만 걸친 지은씨에게 따뜻하게 입으라며 잔소리를 했다. 며칠 후 열린 수퍼볼, 좋아하는 자연 풍경 등의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지은 씨는 “과거 그가 독일에서 살았던 것을 알게됐지만, 어쩌다 홈리스가 됐는지는 차마 묻지 못했다”고 말했다. 듬성듬성 구멍 난 정보를 종합해 그의 인생길을 짐작할 뿐이다. 그래도 좋은 소식은 먼저 알린다. 교도소 출소자이자 마약 중독 경험이 있는 스카티는 가족을 떠나 살다 이달 처음 조카 가족을 만나러 간다. 에이스 캐시 익스프레스 앞에서 만난 홈리스 커플은 오는 8월 아이를 낳을 예정이다.
▶타인의 흔적에서 받는 위로= 도시 홈리스는 주거, 일자리 등 경제적 요인은 물론 인종차별과 성차별, 도시계획 정책까지 얽힌 복합적 문제의 표본이다. 신 씨 자매는 매주 이들을 마주치며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낀다고 했다. “준비한 음식 가방을 다 나눠주면 뿌듯하다가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홈리스들을 마주칠 때면 또다시 죄책감이 든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 앞에서 개인의 선행은 언제나 모자란다.
그래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다른 사람의 흔적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홈리스가 못 보던 옷이나 담요를 덮고 있을 때, 다른 이들도 도와주고 있다는 걸 확인하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퐁세 거리에서 만난 크리스(가운데). 신지은(왼쪽), 신지혜 씨가 크리스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취재, 사진 / 장채원 기자 jang.chaewon@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