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 사거리, 나는 직진을 해야 하는데 좌회전을 했다. 무의식적으로 금요일이면 갔던 로이스 할머니 댁으로 차를 돌린 것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는 할머니의 환한 미소를 볼 수는 없지만 코 끝에 걸린 돋보기 너머로 나를 바라보시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가 처음 할머니를 만났을 때, 할머니는 70이 훌쩍 넘은 나이였다. 교사였던 로이스 할머니는 퇴직 후 성당에서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봉사를 하고 계셨다. 한국 기업이 생기면서 갑자기 늘어난 한인들을 위해서 공과금 내는 것부터 미국 생활에 필요한 정보들까지 열심히 가르쳐 주셨다. 그 모습이 내게는 신선한 감동으로 느껴졌다.
나도 뭔가를 해드리고 싶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그림을 가르쳐 드리겠다고 했더니 할머니는 기뻐하셨다. 매주 월요일에 우리 집으로 오셔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며 할머니와의 또 다른 인연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취미로 도자기를 오래 하셨고, 손재주가 좋아서 그림도 잘 그렸다. 행복한 콧노래를 부르며 붓질하는 즐거움이 가득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 그림을 즐기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카소와 샤갈, 미로의 화풍을 좋아하셨던 할머니는 그들의 작품을 모방하면서도 할머니만의 느낌으로 또 다른 작품을 만들어 냈다. 연세가 있다 보니 붓이 의도한 방향으로 잘 가지 않을 때면 “Teacher! Help me!” 작은 소리로 수줍게 나를 불렀다. 선생님 손길은 마술 같다며 칭찬도 아끼지 않으셨다. 수업이 끝난 뒤 할머니의 얼굴과 손에 묻어 있는 물감을 닦아 드릴 때면 수줍게 활짝 웃는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사랑스러웠다. 집에서도 혼자 열심히 그림을 그려 왔던, 내게는 모범 학생이었다. 그런 할머니의 열정은 나에게 새로운 에너지가 되어서 늘 돌아왔었다.
할머니의 빨간 자동차 안에는 화구들과 책, 서류들이 가득했었다. 성당 안에서의 봉사도 열심히 하셨지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무엇이든 열심히 하셨다. 어려운 사람들의 세금보고를 도와주기 위해서도 공부하러 다니는 모습은 내게도 자극이 되었다. 내가 할머니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용기를 낸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할머니의 끝없는 배움과 봉사의 정신은 내게 많은 가르침이 되었다.
나는 할머니와 영어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면서 추억을 쌓았다. 내 영어 실력은 늘 제자리였지만 할머니의 그림실력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었다. 내가 영어공부를 게을리한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3년 정도 지나서 내가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어서 내가 가끔 방문하기도 하고, 할머니를 모시고 가끔 방문해 주는 친구가 있어서 그림공부는 계속했었다. 그러다 내가 엘에이로 이사 가면서 더 이상 뵐 수 없었다. 10년쯤 지나 어쩌다 보니 내가 다시 몽고메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90을 넘긴 할머니는 여전히 한인들을 위해 영어수업을 하고 계셨다. 일주일에 두 번 하던 것을 건강이 나빠지면서 한 번으로 줄여, 매주 금요일에 하고 계신다고 했다. 다시 뵌 할머니의 모습은 그 연세에도 총명함과 기억력은 여전히 좋았고 눈빛도 살아 있었다.
매주 금요일이면 공부를 계속해오던 분들과 함께 나도 할머니 집으로 가서 영어 서적을 읽었다.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영어책도 읽고 할머니의 말벗이 되어 주기도 했다. 93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주 우리를 기다리셨고 책을 함께 읽었으니 그 정신력과 밝은 모습은 존경스러웠다. 그림은 함께 그릴 수 없었지만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까지 볼 수 있었음에 나는 감사한다.
그동안 할머니가 그렸던 그림들이 할머니의 서제 벽면에 가득 걸려 있는 것을 보면서 지나온 우리의 흔적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나이가 결코 삶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배움의 자세로 살아온 할머니는 나의 노년도 할머니를 닮고 싶게 했다. 내게 도전 정신을 잃지 않게 해 주셨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봉사와 나눔으로 살아야 함도 일깨워 주셨다. 파란 눈의 귀여운 로이스 할머니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서 가끔 불을 밝혀 주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