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만나는 찰나의 깨달음 ‘신비한 체험’
“사는 데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구나”
#10일째
카미노의 하늘은 눈이 부시게 푸르다. 저렇게 푸른 하늘을 보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푸른 하늘 아래, 산길을 걷고, 소나무 사이를 걷고, 넓은 벌판을 걷고, 시냇길을 걷는 나는 행복했다. 진정 행복했다.
조그마한 채플이 있다. 문이 열려있다. 순례자들을 위한 것이리라. 들어갔다. 아무도 없다. 잔잔한 송가가 흐른다. 거룩하다. 홀로 앉아 송가를 들으며 조용한 기도를 드린다. 이런 곳에서의 휴식은 깊이가 있다. 청량하다.
길목에서 만난 자그마한 성당. 여기서 잠시 기도도 하고 쉬어 간다.
다시 걷는다. 호젓한 길. 이런 길을 혼자 걷고 있다. 홀로 걸으면서 생각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침묵이면 족하다. 말을 하려거든 침묵보다 더 좋은 말을 해야 하는데, 침묵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 있을까? 나는 침묵하련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더 침묵하리라.
세상을 사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카미노를 하고 있는 지금, 내 배낭에는 많은 것이 들어있다. 추리고 추려 왔지만 그래도 필요없는 것이 있었다. 길 도중에 버린 것이 몇 개였는지! 다시금 결심한다. 단순하게 살리라. 지금까지도 단순하게 살았지만, 더욱더 단순하게, 심플하게 살리라.
순례길 표지 아래 세워진 조형물이 이채롭다.
길은 계속되고 있다.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넜고,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걸었다. 길을 걷는 동안, 생각도 깊어간다. 깊은 생각 속에는 깨달음이 있다. ‘아하, 이런 것이구나!’ 막혔던 무엇인가가 터져버리듯 찰나의 깨달음이다. 그러나 신기루와 같이 금방 사라져 버린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무엇이었을까?’ ‘금방 깨달은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찾기 위하여 온몸을 기울인다.
그렇다! 산티아고 가는 이 길은 신비한 길이다. 신비한 깨달음이 있는 신비한 길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신비! 그것이 이 길에는 있다. 그 신비를 찾아 오늘도 발걸음을 계속한다. 구름에 달 가듯이 발걸음을 계속한다.
#11일째
어제도, 그제도 하늘에는 둥근달이 떴다. 보름달이다. 보름달을 바라보며 길을 걷는다. 한 시간이 지났다. 사진을 앞으로 찍으면 보름달이 찍히고, 뒤로 찍으면 먼동이 찍힌다. 양 떼 한 무리를 만났다. 일어날 시간이 안 되었는지 자기들끼리 비비면서 잠들어 있다. 조가비 덜렁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놈들은 졸린 눈으로 두리번거린다.
들판에서 아침을 맞는 양 떼들
양떼를 뒤로하고 계속 간다. 완만한 산길로 접어든다. 그때, 유튜브에서도 보지 못한 장면이 보인다. 젊은 부부가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산길을 오르고 있다. 둘 다 큰 배낭을 메고 있고 그 배낭에는 조가비가 달려 있다. 나와 같은 순례자, 산티아고의 길을 걷는 순례자다. 뒤에서 사진 두 장을 찍고 급하게 발을 옮겼다.
“어디서 왔소?” “버지니아에서 왔소.” 버지니아! 그 먼 곳에서 카미노를 하기 위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살짜리 갓난아기를 데리고. 생장 피에드 포트, 나랑 똑같은 곳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다. 14일이 걸렸고, 목적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까지 앞으로 75일을 더 잡는단다.
사연을 들었다. 할아버지가 70년 전에 이 길을 처음 걸었다고 했다. 그 뒤 아버지가 걸었고, 자기가 걸었다. 너무 좋아 아들 이름을 제임스라 짓고, 제임스가 한 살이 되자마자 유모차에 태우고 이렇게 길을 나섰다는 것이다.
아들 이름이 제임스! 마음이 전해온다. 이 길을 스페인어로 하면 산티아고 가는 길, 한국어로 하면 야고보의 길, 영어로 하면 제임스의 길이 아닌가? 얼마나 좋았으면 이름까지도 제임스라 짓고, 혼자 걷기도 힘든 이 길을 한 살밖에 안 된 아들을 데리고 왔을까?
제임스를 축복했다. “Hi, 제임스, I love you. God bless you!” 부모가 활짝 웃는다. 사진 한장 찍어도 되겠느냐 했더니 흔쾌히 응하며 멋진 포즈를 취해준다. 찰칵! 평생 잊지 못할 사진이 될 것이다.
한 살배기 제임스도 유모차를 타고 엄마 아빠와 함께 순례길을 간다. 이들은 버지니아에서 왔다고 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야고보의 길, 그리고 제임스의 길! 이 길은 이런 길이다. 할아버지가 걷고, 아버지가 걷고, 아들이 걷고, 그 아들의 아들이 걷는 길. 나는 소망한다. 언제인가 내 아들이 이 길을 걷고, 내 아들의 아들이, 그 아들의 아들이 이 길을 걷기를!
이렇게 하루가 가고 나는 카미노 11일째를 마쳤다. 카미노를 준비하고 걸었던 이 한 달! 아름다운 날들이었고, 그 아름다운 날들 속에서 나는 내내 행복했다. 〈계속〉
카미노 길엔 이런 십자가가 많이 보인다.
글·사진/ 송희섭 애틀랜타 시온한인연합감리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