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의 돌풍이 놀랍다.‘건국전쟁’은 70년간 은폐돼온 이승만의 공(功)을 증언하는 사료들을 발굴해 표현의 자유란 명분으로 현대사를 멋대로 왜곡해온 좌편향 영상물들에 경종을 울리며 국민을 사로잡았다. ‘이 영화는 그동안 왜곡되거나 잘못 알려진 진실을 ‘팩트’에 근거한 실증적 영상자료 발굴을 통해 북한과 좌파 세력 등이 가짜뉴스로 우리 국민을 ‘가스라이팅’ 했음을 보여준다. 북한 김씨 세습독재정권과 이들의 역사관에 오염된 좌파 정치세력이 ‘독재자’ ‘친일파’ 프레임을 씌워 이승만 지우기에 70여년간 공들여온 데 대한 반작용이라 ‘건국전쟁’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틀을 잡고, 김일성의 침략에서 나라를 지키고, 거부하던 미국을 이끌어 한미동맹을 맺었다. 어느 하나라도 없었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의 결단을 내리고, 지금의 교육제도를 정착시켰다. 광복 1년이 지나고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자유가 무언지조차 모르는 국민의 77%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보통선거권과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통한 사유재산권 제도를 바탕으로 자유 민주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그는 국가 재정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자하고 초등교육 6년 무상 의무교육제를 도입해 1948년 문맹률 80%를 10년 만에 20%로 낮추었다. 국민 대다수가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임기동안 2만 명 이상의 인재들을 국비유학 보냈으며, 이들은 이 후 박정희 시절 국가 근대화, 공업화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은 4·19 학생의거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때 대학 2년 재학중이던 필자는 학생 시위대와 함께 경무대 정문 앞까지 진출했다가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절친 안승준 군을 잃었다. 그는 애국자였지만, 좌파로부터는 “미국에 붙어 단정(單政) 수립에 앞장선 분단의 원흉”으로 지탄받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도 공산화돼 북한처럼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에 묶였을 것이다. 한 민족이 두 나라로 나뉘어, 북한은 세계 최빈국이 된 반면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된 것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친미, 반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이승만이 자리 잡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즈음 방한했던 닉슨은 이승만의 외교지략과 지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승만은 휴전의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실리를 얻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미국으로서는 큰 손해인 ‘선물’을 한국에 안기면서도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돌발행동을 막기 위해 닉슨 부통령을 한국에 파견했다. 이승만을 만난 닉슨은 “한국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전쟁이 재발할 경우에는 유엔군은 한국을 돕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경제원조가 중단되고 유엔군은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아이젠하워의 협박 서한을 전달했다. 이승만은 친서를 훑어보고 눈 한번 깜빡하지 않으며 “잘 쓴 편지군요”라고 운을 뗀 후, 닉슨을 이렇게 설득했다. “사실 한국의 단독행동과 관련된 나의 모든 발언들은 미국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미국이 이승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미국은 미국이 가진 가장 효과적인 협상 수단을 잃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의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항구적인 견제가 된다.”
좌파 종북세력은 이승만을 증오한다.. 이승만에 대한 증오는 이승만 시대를 살지 않은 586 운동권이 만들어낸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은 이승만을 ‘하와이 깡패’, 박정희를 ‘스네이크 박’이라며 조롱하고 왜곡했다. 허위와 가짜 뉴스라는 유령이 ‘팩트의 탈’을 쓰고 도시와 온라인을 배회하는 시대다. 가짜 뉴스는 민주 사회의 적이다.
하와이에서 힘든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민족을 위한 축복기도는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았다. 대한민국을 낳았지만 대한민국이 버린 남자, 국부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의 한 요양원에서 쓸쓸히 영면했다. 1920년 이승만의 중국 밀항을 도왔던 절친 보스윅이 이승만 영결식에 남긴 절규가 귀를 때린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 그는 눈을 감으면서 아들 이인수씨를 통해 평소 즐겨 읽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는 갈라디아서 5장1절의 말씀을 인용해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그의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공작봉 중턱에 안장됐다. 하관할 때 별안간 소나기가 내렸다. 그것은 한평생을 조국을 위해 살아온 인물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하여 눈물 같은 비를 뿌린 것이 아니었을까. 작가 복거일은 이승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는 질량이 매우 큰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