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와서 내 이름을 미국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홍영 김’이라고 하니 미국사람들이 ‘홍영’이라는 발음을 잘 못했다. 어떤 분은 ‘홍’ 이 내 첫 이름이고 ‘영’ 이 중간이름이라며 ‘홍“이라 부르고, 어떤 분은 ‘항양’ 어떤 분은 ‘홍경’하고 부르는 등 제 멋대로 불렀다. 같은 해에 유학을 와 알게 된 두 중국 학생들은 조지, 리차드라는 미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이름이 불려 지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낯선 나의 이름을 부르려고 신경을 쓰는 사람을 보면 미안하고, 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다. 김 대중 대통령의 첫 이름을 D.J., 김 종필총리 첫 이름을 J.P., 김 영삼 대통령 첫 이름을 Y.S. 하는 식으로 나도 내 영어이름의 첫 글자들을 따 보았다. Hong에서 H를 Yung에서 Y를 따서 붙이니 ‘HY’, ‘하이’가 되었다.
미국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내이름은 하이(Hy)입니다. 나를 만나면 하이, 하이(Hi, Hy)해 주십시오” 했다. 나의 학급에 처음에 온 학생들에게 나를 그렇게 소개하면 대개 웃음이 터진다. 특이하지만 좋은 인상의 이름 소개, 동양 얼굴, 듣기 좋고, 부르기 쉽고, 인사말 ‘하이’ 와 내 이름 ‘하이’가 운율적이다. 덕분에 두 번째 만나는 사람들도 대부분 나의 이름을 기억한다.
1960년대 한국에서 교사로 일할 때, 가난한 가정에서 온 아이들 이름 중에는 남자애들은 천석, 만석, 용복, 부길, 여자 이름 중엔 부자, 복녀, 복자 등 재산의 부를 뜻하는 이름들이 많은 것 같았다. 가난하게 사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겐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어 살기를 바라는 염원이 자녀들의 이름 속에 풍기는 것 같았다. 부자 이름을 가진 학생들이 현실에서는 가난해 보였다.
만석이란 아이가 자라면서 수만 번 만석이라 불리고, 할아버지가 자주 말하기를, “너는 만석꾼이 될 거다. 태몽이 신비했고, 천하 제일 작명장이가 지었고, 수만 번 불리니 너는 틀림없이 큰 부자가 될 거야” 하시는 말씀이 생생하고, 이름이 불려 질 때마다 부자가 되어야 겠다는 성취동기를 유발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데도 현실에서는 “이름은 그저 이름일 따름이야”라고 스스로 느낄지도 모른다. 부자가 되려면 수만가지 요인이 있어도, 이름도 그 수만 가지 요인중에 작은 하나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첫 아들이 한국에서 1960년대에 태어났을 때 이름을 정성 성(誠) 외자이름으로 지었다. 당시 내 생각에는 꾸준히 노력하는 정성이 우리가 살아 가는데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느꼈기에 집안의 돌림도 무시하고, 두자 이름의 유행도 무시하고 외자 이름으로 지었다. 열심히 노력하며 살라는 나의 바람이었다.
아들이 미국에 와서 살게 되니, 한국 이름이 어색하고 별나 보였으나 미국식 이름으로 고치지 않았다. 둘째가 미국에서 태어났을 때는 흔하고 부르기 쉬운 미국 이름 ‘잔(John)’이라고 지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큰 아들 이름은 미국 전문인들 사이에서 독특해서 좋고, 둘째 이름은 부르기 좋고 친근해서 좋다.
이름 하나를 고쳐 전 인간의 가치관과 태도가 바뀌어 지고, 딴 인간이 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쉽게 살 수 있겠는가? 유태인 학살 때의 나치군의 괴수 중에 하나가 이름을 바꾸고 숨어살았다. 이름을 바꾸고 운명을 바꾸었다. 그런데 그는 나중에 붙잡혀 재판을 받았다. 지명수배의 죄인들은 자기의 이름을 바꾸어 법망을 피해보려 할 것이다. 대학에 떨어진 아이 이름을 바꾼다고 붙는다면 닥쳐올 혼란은 충분히 상상이 간다.
이웃에 사는 존경할 만한 의사의 이름이 한국에서 형을 집행 당한 사형수로 보도되었다. 알고 보니 획수 하나 틀리지 않은 동명 이인이었다. 사형수와 동명 이인을 찾아보면 존경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손녀가 태어났을 때 며느리가 나에게 아기이름을 생각해 보라 고했다. 어떤 이름을 지어 주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기처럼 귀엽고 찬란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이 이름 저 이름 생각해 보았다. 며칠 후에 아들 부부는 그들이 좋아하는 가수 이름을 따라 아기이름을 지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 미국 부모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사람, 위대한 인물이나 가까운 친척의 이름을 골라 아기에게 주는, 인물 중심의 경향이 보인다. 가령 존 이 아버지였다면, 존 2세 가 그 아들, 존 3세가 손자, 존 4세가 그 증손자인데, 몇 대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는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과정이 집집마다 무척 다양 하지만 자연, 추상적인 뜻, 가치관을 중시하고 돌림을 참고한다. 옥편을 뒤지는 할아버지, 예쁜 순 한국말의 이름을 고르는 새 세대의 부모, 이름의 획수를 헤아리는 아버지, 작명가에게 찾아가는 부모나 연예인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