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30km씩 걸었다, 벌써 350km다, 이때 쯤이면 순례자 모두 입을 닫는다”
# 12일째
오늘도 걸었다. 걷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걷는 것이 운명이 되었다. 도중에 이정표가 있다. 산티아고까지 457km가 남았단다. 여태까지 350km를 걸었다는 이야기. 하루에 30km 정도를 걸은 셈이다.
고되고 힘들었다. 그러나 어려운 길은 아니었다. 왜 그러냐면, 목적지가 분명하고, 매일 걸어야 할 이정표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목적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들은 여전히 넓다. 그 사이로 가는 선처럼 길이 있고 그 길을 걷는다. 이것을 앱으로 보면 노란 선 위에 파란 점 하나. 그 파란 점이 나다. 아까는 저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여기에 있다.
이때쯤이면 침묵이 깊어진다. 무리를 지어가는 순례자들도 침묵이다. 침묵 속에서 순례의 길을 걷는다. 침묵의 소리를 들으면서.
길은 계속 이어진다. 고개를 몇 개 넘고 구비를 몇 개 지난다. 벌판도 지난다. 이럴 때는 호흡을 크게 해야 한다. 떼어 가져갈 수 없으니 호흡을 크게 해서 가슴에 넣을 수밖에. “숨이 되어 들어가라.”
끝없는 길, 카미노 길 따라 이렇게 전형적인 스페인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도중에 인디애나에서 온 가족을 만났다. 아빠, 엄마, 20대 후반의 딸. 엄마는 교사, 딸은 영국에서 공부하는 학생. 지난해, 10일 동안 여기까지 왔단다. 이번에도 교사인 엄마가 10일밖에 휴가를 얻지 못해 10일밖에 할 수 없단다. 하는 데까지 하고, 돌아가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그렇다! 이 길은 이렇게 자유로운 길이다. 정해진 시간도 없고 정해진 거리도 없다. 하다가 지치면 돌아가고, 돌아와 다시 하면 되는 길이다.
점심이 지났다. 하나씩, 하나씩 알베르게로 들어가고 남은 자들이 홀로 걷는다. 하늘을 보며 땅을 보며, 그림자 벗 삼아 홀로 걷는다.
하늘을 본다.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 동서남북 어디에 카메라를 들이대도 구름 한 점이 없다. 그 푸른 하늘 아래 드넓은 벌판. 하늘은 벌판에서 만나고 벌판은 하늘에서 만난다. 그 사이 한 줄기 길. 그 길을 걷고 있다.
길 없는 길에서 길을 만나 그 길을 걸었다. 평생을 걸었다. 그 길은 카미노, 이 길로 이어졌다. 이제 20일을 걸으면 이 길도 끝이 난다. 다른 길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여태 걸었던 것처럼 그렇게 걸으면 될 것이다.
순례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돌에도,나무에도 이렇게 이정표를 새겨놓았다.
# 13일째
카미노를 준비할 때부터 이날을 기다렸다. 지금 있는 곳에서 25km 안에 성 니콜라스 알베르게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거기서 머물려 한다.
성 니콜라스는 유서 깊은 수도원이었다. 깊은 영성을 가진 소수의 수도사들이 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카미노의 순례길이 생긴 후에,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많아졌다. 수도사들은 더 깊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곳은 알베르게가 되어 순례자의 숙소가 되었다. 카미노의 길에서 가장 오래된 알베르게 중의 하나. 오픈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다. 예약도 안 된다. 운이 좋으면 머물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 마을까지 가야 한다.
순례자들의 숙소가 된 성 니콜라스 성당 알베르게 입구.
점심때가 조금 지났다. 보통 때 같으면 여기서 점심을 하고, 두 시간을 더 걸어 알베르게에 이른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까지다. 멀리 성 니콜라스가 보이기 때문이다. 한눈에 보아도 심플하다. 고색창연한 건물 하나, 그리고 그 뒤에 부속 건물 하나. 고색창연한 건물은 수도원이었고, 부속 건물은 새로 지은 것. 운이 좋게도 오픈이고, 자고 갈 수도 있단다.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받고 짐을 풀었다.
전기도 안 들어오고 와이파이도 없다. 주변에 인가도 없다. 간신히 프로판 가스로 뜨거운 물을 얻을 수 있었다. 배가 고팠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컵라면 두 개가 있다. 점심으로 한 개를 먹었다. 꿀맛! 나머지 하나는 저녁용.
성 니콜라스 성당 안.
누가 말했던가? 우리는 누구나 절대자 앞에서 단독자로서 삶과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고 걸어가는 수도사라고.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런 수도원을 동경했다.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살아가는 것을. 그래서 은퇴 후에도 수도원을 염두에 두고 집을 구했다. 비록 낡았지만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 지금의 집, 가장 마음에 들었다. 거기서 산다. 수도사처럼 살지는 못해도 수도사와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다.
카미노 길 곳곳에 이런 성당이 있다.
오늘도 날이 저문다. “드디어 시작이다!” 했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13일이 지났다. 생각해 본다. 나는 오랫동안 카미노를 동경했고, 그리워했고, 품고 있었다. 품은 것은 언제인가 새가 되어 나온다. 그렇게 새가 되어 나온 이 길!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이 길을 마쳤을 때 나는 말 할 수 있으리라. 산티아고 가는 길! 내 인생 중에 가장 소중하고 가장 행복했던 길이었다고, 그래서 이 길 이후, 나는 더욱더 행복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다고. 〈계속〉
글·사진=송희섭 / 애틀랜타 시온연합감리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