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했다 집에 돌아와 차를 세우려고 뜰 옆으로 들어오니 집 건물 벽 옆에 죽 심어져 있는 진달래꽃 아래에 분홍빛 조각이 있었다. 휴지가 봄 바람에 날라 다니다 걸린 것 같아서 차를 세운 후 가까이 갔다. 근데 웬걸, 쓰레기가 아니라 활짝 핀 진달래 꽃이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축축한 겨울 분위기에서 기운을 다 차리지 못한 진달래꽃 정원수들은 아직 봄을 데려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한 나무 아래 부분에 생긴 이변에 놀라 “무엇이 그리 급하니?”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 저기에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있었다. 봄 바람과 변덕스런 날씨에 밀려서 꽃을 피우려는 꿈틀거림은 분명 계절이 바뀌었다는 신호다.
그날부터 나는 집을 드나들 적마다 그 꽃에 눈을 맞춘다. 이주일이 되어가도 아직 혼자인 꽃을 보며 “외롭겠다” 중얼거린다. 인생은 혼자 가는 길이라지만 옆에 친구들이 있다면 덜 외로운 것이 아닌가. 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왕자의 별에 사는 장미꽃 한 송이라면 모를까 사실 세상만사 모든 생명은 같을 것이다. 주위로 진달래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날 상상을 하면서 봄의 전령이 된 이 꽃에게 시들지 말고 끈질기게 잘 버티라고 부탁한다.
이 진달래꽃처럼 무엇이든 튀어나면 시선을 끈다. 오래전의 내가 이 꽃처럼 성급하게 성장하고 싶어서 기회가 생기면 집 주변만 아니라 동네 밖으로, 그리고 타지로 돌아다녔다. 어디든 설치고 다녔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 다녔던 그때는 참으로 겁이 없었다. 칫솔과 치약만 챙겨서 고속버스나 기차를 타고 산으로 바다로 혼자서 남한이 좁다고 돌아다녔다. 대학시절은 그런 기회가 더욱 많았다. 유신체제에 반대하던 대학생들의 대모로 장기간 학교가 문을 닫았던 적도 있어서 나의 방랑은 시간 보다 돈이 문제였었다.
여러 명소나 역사책에 나온 지역은 과거와 현재를 보는 통로라 재미있었고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불교 사찰들은 흥미진진한 스토리의 보고였다. 특히 오대산 중턱 암자의 작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어둠에 둘러싸여서 본 하늘의 달과 별은 내 삶의 등대였다.
유난히 밝은 별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며 행복 했었고 어둑한 새벽 4시에 일어나 찬물에 세수한 것을 회상하면 그 얼음장 차가움에 지금도 정신이 버쩍 든다. 혼자서 누렸던 이런 상큼한 체험이 떠오르면 나는 내 몸밖으로 나가서 그때의 나를 본다.
작년 여름, 대학시절 가깝게 지낸 친구들이 서울에서 만났다. 참으로 오랜만의 재회여서 덴버에 사는 친구는 한국을 갔지만 나는 둘째딸의 출산이 가까워서 가지 않았다. 신문방송학과, 경제과, 법학과 등 전공은 달랐지만 모두 약간 괴짜 성향이 있어서 잘 어울려 우리는 요란한 대학생활을 보냈다. 반세기 후에 다시 모여서 흥미로운 시간을 보낸 그들 한사람 한사람은 내게 소중한 인연이다.
아직 맹렬하게 사회 활동하는 자랑스러운 여장부들이 있는 그 모임에서 할머니 역할에 만족하고 사는 내 근황을 들은 한국에 사는 한 친구는 크게 놀랐고 예전에 내가 뭔가 다르게 성공하리라 예상했다가 너무나 평범하게 사는 나의 소식에 좀 실망한 것 같았다. 그녀의 반응을 듣고 웃고 넘겼지만 사실 좀 움칫했다. 대학시절 튀어나게 설치고 다녀서 친구들에게 강한 인상을 준 나와 현재의 나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얼마전에 덴버에 사는 친구가 말했다. “우리들 중 너가 좀 특별했었지” 솔직히 대학시절 5명의 개성이 튀어났던 여자들의 만남 자체가 특별했었다. 서로에게 긍정적인 충동을 줬던 야망이 컸던 청춘들은 내가 미국 와서 군복을 입었듯이 각자 ‘가지 않은 길’ 을 선택해서 열심히 삶을 사랑하며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됐다.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었던 모두의 굴곡진 인생여정은 스토리로 풀면 장편소설 몇 편은 나온다.
나는 늘 스토리를 찾아 다녔고 사람이나 장소, 어디든 색다른 스토리에 나를 삽입시켰다. 그동안 발로 뛰며 보고 듣고 만든 많은 스토리들이 결국은 나의 가슴속에서 내 것으로 재편집되어 기쁨을 주니 한국에 사는 옛 친구가 모르는 근사한 나의 노후가 아닌가. 더더욱 그것을 글로 써서 타인들과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