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에서 울려 퍼진 아리랑에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이 붉어 졌다. 파독 광부 60주년을 맞아 음악감독 김문길씨는 애정 어린 손짓으로 지휘를 하며 머리 희끗 한 노부부 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그 마음을 서로 알아본 이들은 고개를 떨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나조차도 그들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표정과 고국을 향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1963년 12월 23일 독일 광부 제 1진을 시작으로 1977년까지 약 8000명이 고국을 떠나온 것이다. 그 당시 한국의 경제개발과 독일의 인력수급을 위해 맺은 한 독 경제협약은 가난한 한국 청년들에게 희망이 되었던 것 같다. 가족들을 위해서 또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기대와 모험으로 용기를 내어 독일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떠나온 길 한국에 있는 부모 형제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자부심으로 시작된 광부의 일은 견디기 힘들 정도의 위험천만한 작업이었고 생과사의 경계에서 부디 오늘 하루도 무사하길 간절히 기도하며 버티는 날이 되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흘려 보냈으며 갱도가 무너 졌을 때는 돌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지만 억척스럽게 일해 한국으로 돈을 보내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행복했다고들 하셨다.
다치지 말고 죽지 말고 돌아와라! 매일 이 구호를 외치며 갱도 안으로 들어가 하루에도 땀에 젖은 양말을 여섯 번이나 쥐어짜고 다시 신고 일을 했다 하니 그 날들을 어떻게 견디어 냈을지 그 분들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위대했는지 생각 할 수 있다.
광부에 이어 간호사도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총 11,000명의 젊은 여성들이 당당하고 포부에 찬 모습으로 한국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그 젊은 여성들은 낯선 땅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언어 적응이 어려워 몸으로 하는 모든 험하고 고된 일들을 맡아 하면서도 영리하고 친절하게 항상 웃으면서 환자들을 돌보아 주니 독일인 의료진과 환자들은 그녀들을 한국에서 온 천사들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그렇게 광부와 간호사들이 일을 하여 한국으로 보내오는 돈은 그 당시 한국경제의 총수출액에 2% 규모에 해당될 정도로 나라 경제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었고 한국에 남아 있는 부모 형제 들에게도 집을 사고 땅을 사면서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주춧돌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돌아보니 어찌 살았나 싶지만 힘들지 않았고 보람된 일이 였으며 잘 견디어 준 자신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고 하신다. 이제는 자녀들이 그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으니 그 또한 그 분들에게는 자부심이 되어줄 것이다.
내가 한국을 떠나 미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날이 떠오른다. 남편이 먼저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자동차 산업에 참여하며 시작된 이민 생활이었다. 처음 생각은 5년정도만 있다가 아이들 더 크기 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지금 우리 가족은 미국에서 18년째 살고 있다. 나 역시 어떻게 그 날들이 지났나 싶을 정도로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그사이 아이들은 다 큰 청년이 되었다. 우리 아이들 역시 이곳 에서의 삶이 계속되어질 거라 생각하니 고국으로 돌아갈 날이 언제일까 싶은 마음이다.
어떤 이유로든 지금도 많은 나라들 사이로 고국을 떠나 다른 곳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해 떠나고 정착하는 이민자들은 계속되고 있다. 그 옛날도 그랬지만 지금도 고국을 떠나 익숙하지 않은 나라로 향할 수 있는 건 희망이 있기 때문 일 것이다. 그 희망으로 많은 어려움을 견디기도 하고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나며 이민자 로서의 삶을 이어 나 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낯선 땅 독일에서 60년을 살아 내신 그 분들이 여전히 눈물 글썽이며 하신 말씀이 가슴에 깊이 남는다. “그래도 우리는 한국 사람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지금은 미국 시민권자가 되어 있고 남편과 나도 아직 이곳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갈 계획이 없다. 그렇게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그래도 우리는 한국 사람입니다”를 되새기며 살아가는 이민자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