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장 같은 숙소 마치 관 속 같아 ‘죽음 체험’
샐러드에 라면 한 그릇이 수라상 안 부러워
# 16일째
어제 묵은 알베르게는 특이했다. 아주 깨끗했고 관리가 잘된 곳이다. 그러나 닭장과 같았다. 다른 알베르게는 2층 침대 사이가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은 다닐 수 있었는데 이곳은 다닥다닥이다. 긴 복도를 통해 위아래로 들어가야 한다. 잠자리에 들었다. 관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래, 카미노를 하면서 죽는 경험도 해야지. 그러고 죽었다. 아침이 되어 다시 살아나 길을 나선다.
오늘 가야 할 곳은 사하건(Sahagun). 17㎞ 떨어져 있다. 17킬로는 어렵지 않다. 점심 전에 갈 수 있는 거리다. 그래도 거기서 멈춰야 하는 것은 숨 고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거기서 멈춰 전열을 가다듬고 나머지 길을 간다.
길을 나선다. 신선하다. 새벽의 길은 여전히 신선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행복하다. 이런 새벽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은총이다.
개 한 마리가 지나간다. 나를 킁킁거리며 지나간다. 개 몸에는 카미노의 조개 표시가 붙어있고, 누구의 신발인지 신발도 있다. 그 뒤를 개 주인이 따라서 온다. 카미노를 하는 순례자다. 나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있다. 자기 것과 개의 것을 다 지고 가는 것이리라. 배낭 뒤에는 개밥 그릇도 달려 있다. 개와 함께 순례하는 순례자라 해야 하나, 주인과 함께 순례하는 개라고 해야 하나? 개에게도 추억이 있다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개도 주인의 신발을 지고 간다. 몸에 카미노 표시인 조가비 그림이 있다.
17km를 걷는 동안 몇 군데의 마을을 지나고 성당을 지났다. 로마 시대에 지어졌다는 다리도 지났다.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는 옛사람의 숨결이 보인다. 이런 옛사람의 숨결을 느끼며 걷는 동안 벌써 목적지다. 입구에 긴 다리가 있다. 그 다리 아래를 지나간다. 다리 아래에 크게 쓴 한글이 보인다. “힘내!”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내일을 준비한다. 내일을 준비할 때, 물 2병을 잊지 않아야 한다.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몸이 물을 달라 한다. 한 병은 밤에 마시고 한 병은 아침에 가지고 간다.
사하건 입구 다리 옆 전봇대에 쓰여 있는 “힘내!”. 앞서간 한국인이 썼을 것이다.
이렇게 16일을 걸었다. 날짜로는 반을 했고, 거리로는 반이 넘었다. 시간이 빨리 간다. 미국보다 더 빠르다. 이런 속도라면 내 남은 세월도 금방이리라. 이렇게 빠른 세월 속에서 몇 년 살다가 가는 것이 인생인데, 혹 폐만 끼치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암연히 수수롭다.
# 17일째
일찍 잠에서 깼다. 날씨를 체크한다. 며칠 전이 생각난다. 알베르게 1층 침대에 몸을 뉘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한글. “2019년 9월 17일, 하루 종일 비를 맞았다. 추워죽겠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
카미노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비옷을 입고 판초 우의를 덮었음에도 강풍, 강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산맥을 넘었을 때, 새파란 입술에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오늘은 맑음. 카미노 첫날을 빼놓고는 늘 맑은 날씨였다. 감사한 일이다.
로마 시절에 지어졌다는 다리. 옛사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오늘도 기막힌 새벽. 별만 반짝이는 기막힌 새벽. 이런 새벽을 걷는다. 아무도 없는 이 길을 행복하도록 걷는다. 멀리서 기차가 간다. 새벽 기차다. 저 기차를 프랑스에서는 테제베(TGV)라 하고 스페인에서는 아베(AVE)라고 한다. 저 아베를 타면 산티아고까지 2시간이다. 그 2시간 길을 10일을 넘어 걸어간다.
걷는다. 또 걷는다. 해가 중천에 떴다. 알베르게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보인다. 여기라면 이 시간에도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다. 메뉴판이 보인다. 칠판 가득 써 놓은 메뉴들. 맨 아래에 한글이 보인다. “신라면, 햇반, 젓가락도 있어요!! ㅋㅋㅋ”
샐러드와 신라면을 시켰다. 오렌지 주스를 곁들여서. 한 상 가득 나온다. 나라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어디 광개토대왕이 샐러드를 먹어보았겠는가? 세종대왕이 신라면을 먹어보았겠는가?
식당 메뉴판에 한국 음식이 있다. 신라면, 햇반. 젓가락도 있단다.
다시 걸었다. 해가 넘어가도록 걸었다. 저기 렐리고스(Religos)가 보인다. 오늘의 목적지다. 알베르게에 짐을 내려놓는다. 이렇게 17일째가 저문다.
뒤돌아본다. 은퇴 후, 꽃이 좋아 꽃밭에 살았다. 바람이 전해 준 소식, 카미노의 소식을 들었다. 벼락 같이 짐을 싸고 비아리츠행 비행기에 올랐다. 프랑스 비아리츠는 바다를 끼고 있다. 눈부시게 푸른 바다를 마음껏 품었다.
버스와 기차로 생장 피에드포트에 왔다. 카미노를 시작한 것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땅으로 들어왔다. 강을 건넜고 들을 지났다. 17일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깝다. 반을 더 온 것이 아쉽다. 다시 오지 못할 지난날의 카미노가 벌써 그립다. 〈계속〉
글·사진=송희섭 애틀랜타 시온한인연합감리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