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들린 물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빗소리가 들렸지만 그와는 다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불안함은 뭐지? 새벽 스산한 기운에 이불의 온기를 걷어내기 싫었지만 나가 보니 내 작업실 한쪽 바닥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고 그 위로 물이 똑 똑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새집에 내가 첫 세입자인데 물이 새다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허겁지겁 큰 수건을 가져다 바닥을 닦고 떨어지는 물을 받기 위해 우선 붓 씻는 통을 물받이로 두었다. 돌아서는 데 반대쪽 바닥이 미끈거렸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 같지도 않은데 바닥에 더 많은 물이 고여 있었다. 창문 아래 벽을 타고 물이 소리 없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밤중에 이런 난리가 웬 말이냐. 오래된 집이나 혹은 벽의 갈라진 틈으로 물이 새는 정도는 이해가 가지만 새집 천장에서, 창틀에서 물이 홍수 난 것처럼 들어오다니 무슨 이런 집이 있나!
결국 멕시코가 이렇지 뭐 하는 넋두리를 하며 물청소를 한바탕 했다. 그나마 바닥이 다 타일로 되어 있어서 일이 크지는 않았지만 바닥과 맞닿은 책장 속의 책과 스케치북이 물에 젖은 것은 속상했다. 끝났나 싶었는데 어디선가 계속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제 방 입구 천장에서 머리 위로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여기도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한숨이 나왔다. 그나마 맘에 드는 집을 구했다고 믿으며 멕시코에 정을 붙이려고 애쓰고 있는데 이건 무슨 일인지, 이삿짐 정리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이사를 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잠깐 들었지만 엄두가 안 났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곳은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고인 물 위를 신나게 첨벙거리며 돌아다니는 아이들처럼 반들반들한 타일 위로 소리 내며 떨어지는 물방울들도 신이 났다. 묵은 살림을 대부분 정리하고 이사를 와서 물받이 할 만한 허드레 통도 없는데 뭘로 이 빗물을 받아야 할지, 슬슬 짜증이 올라왔지만 그건 나중이고 우선 떨어지는 물을 처리해야 했다.
쌀 씻는 통부터 나물 무치는 볼, 냄비까지, 바닥 여기저기 늘어놓고 보니 우습지도 않았다. 대충 바닥에 고인 물은 수건으로 모아서 닦은 뒤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이젠 더 이상 집안에 폭포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고 해도 어찌할 수 없다며 체념하듯 이불을 덮고 누웠다.
다양한 모양의 통 속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가관이었다. 노래로 치자면 그런 음치도 없을 것이다. 밖에서는 억수 같은 빗소리가 괴성을 지르고 있고, 이건 더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제 각각의 그릇들이 내는 물소리들은 세찬 비바람에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듯했다. 바깥소리에 묻힐 법도 한데 한 방울씩 떨어지는 그 작은 소리들이 예민한 내 귓속을 파고들며 은근히 신경 쓰이게 했다. 방문 틈으로 물소리가 줄줄 흘러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아침 햇살은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활짝 웃고 있다. 오전 내 물청소를 했다. 평소에 이렇게 청소를 열심히 했다면 우리 집은 반짝거림에 눈이 부셨을 거라며 나는 툴툴거렸다. 집주인은 집을 지었다는 사람을 보내서 수리하게 했다. 주차장 위의 안방과 작업실로 쓰는 방을 증축하면서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옥상의 방수처리가 부실했고, 증축한 벽과 벽의 시멘트가 마르면서 틈이 갈라져 있었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상황의 이웃집에서는 집안에서 폭포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가구에 비닐을 씌우고 방마다 수리하는 일이 물청소보다 훨씬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비가 오면 또 물이 새고 다시 수리를 반복했지만 고생한 만큼 양이 줄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내가 그 집에 사는 동안은 빗소리만 들어도 걱정부터 되었다.
오늘 내리는 비에 물받이 통속에서 들려왔던 나를 괴롭힌 그 물소리가 생각났다. 살면서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도 지나고 나면 웃을 일이 되어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